참나무류의 키 큰 나무가 인공 호수의 물속에 반쯤 잠긴 채 허리께에서 옥수수수염 같은 햇뿌리를 수면 위아래로 생성하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통기(通氣) 작용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네이버 검색 수준의 지식에서 그 나무는 수생(水生) 식물은 아니었다. 다만, 살기 위해 기상천외한 창조적 생명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다슬기 같은 미물도 물결이 거친 곳에서는 표피를 두껍고 단단하게 다진다고 한다. 북극으로 이주한 곰들은 자신을 자연환경과 조화시켜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털색을 하얀색으로 바꾸었다. 파리 한 마리도 파리채를 들면 알아차리고 생존 비행을 한다. 해파리들은 수온이 달라져 생존 조건이 어려워지자 서로 달라붙어 30m까지 길게 군체를 이루어 조직적인 생명 활동을 수행하고, 심지어 광물질도 상태의 유지(곧 광물질의 생존)를 위해서 끊임없는 입자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종(種)의 사슴들은 개체 수가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개체 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수의 사슴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자살은 인간만의 특권의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과학 문명이 극치에 도달한 이 시대에도 인간들이 창조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복제된 인간도, 인공지능도, 로봇도 생명은 아니다. 예컨대, 모기를 배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모기라는 생명이 번식할 수 있게는 할 수 있지만, 모기라는 생명 자체는 단 한 마리도 창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기는커녕 풀 한 포기 만들 수 없다. 그것이 인성과 불성(佛性)의 차이점이다.

뭇 생명은 오로지 불성의 한 작용이다. 불성을 비로자나불·성령·진아(眞我)·일심(一心)·진여(眞如)·무(無)·공(空)·태극(太極)·신(神)·하나님·야훼 등 뭐라고 부르든 그 명사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실익이 없다고 본다.

모든 생명은 생존과 번식을 지향하고, 인간들도 그러하기가 십상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진화된 인간이 다른 중생들의 평면적인 생존본능과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자비(사랑)와 지혜가 아닐까? 지구별의 가장 진화된 생명들이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는 지금, 떠오른 생각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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