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를 시작하며

『금강경』은 많은 분들이 이미 번역을 했고, 불교신자는 물론 참선이나 명상에 관심있는 이는 누구나 한번쯤 읽고 암송도 하고 필사도 게을리 하지 않는 책이다. 불교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이며 필자도 그런 관심을 가지고 『금강경』을 본 적이 있다.

유명한 김용옥 교수의 책을 빌려서 본 적이 있었는데 몇 장 넘기다 그냥 덮어버렸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어줍쟎은 소감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와 무관하지도 않고 문사철의 박사학위씩이나 가진 인문학 박사인데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정말 ‘난독증’을 유발하게 하는 괴팍한 서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이해나 하고 보는 걸까? 아주 많이 두껍지 않고 하드커버도 아닌 책을 책장에 훈장처럼 꽂아 두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과의 조우는 그렇게 원만치 못하게 1막을 내렸다. 이후 송산 스님과 무비 스님의 책을 봤는데 상대적으로 이해하기가 훨씬 편했다. 하지만 구마라집이 번역한 이 책을 다시 한글로 옮겼는데 그 글로만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오랜 숙제로 남은 듯한 이 문제의식은 한자 한 글자 한 글자에 생명력이 부족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우리 말 특히 동사 등의 용언(用言)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는 물론 의지와 존경의 수준 등의 차이 아니 차별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생동하는 언어에 담긴 시간과 의지의 힘 그리고 아름다움을 우리 한글에서 지운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死語]로서의 한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말로 쓰이지 않고 글로만 남

은 세상의 모든 것의 죽음은 애처롭기 그지 없다. 까닭에 우리가 경전을 비롯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할 때는 그 법회[會上]에 온 것 같은 생동감을 불어 넣는 글쓰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부분은 아래 부연되므로 생략하고 오늘은 제1장에 해당하는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부터 생생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32분까지 나눠져 있는데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연재해보고자 한다. 분량상의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과목을 낸 게 별로 탐탁치 않은 점도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신 “생각의 흐름”을 32분으로 나눈 것 자체가 좀 무엄하다는 참람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얼마나 생생해질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쓴 것이니 언젠가 눈밝은 이를 만나 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해본다.

001 如是我聞(여시아문)-“이와 같이 우리는 들었다.”

부처님 경전이면 늘 등장하는 이 말 ‘여시아문’은 어쩌면 『금강경』 가운데 나오는 ‘불설(佛說)’의 반대말이 아닌가 싶다. ‘여시불설(如是佛說)’이라고 하면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 된다. 그게 더 부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표현 같지만 어떻게 보면 잘못이 있으면 부처님 탓으로 돌리는 참람한 것이 된다. “아까 이렇게 말했잖아요?”라고 따지는 듯한 하극상의 말이 범람하는 시대고 그것을 지적하면 꼰대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부처님, 그때는 이렇게 말했잖아요?”라고 자기 기억이 옳다고 달려드는 바리새인 같은 제자나 대중들에게 자만감을 털어버리고 오직 ‘내 탓’ 즉 소견이나 안목이 좁고 작음을 알게 하는 것이 ‘여시아문’ 바로 이 말이 처음 나오는 이유는 아닐까? 듣는 행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 가운데 자성(自性)을 일으켜서 파동이나 파장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울러, 『금강경』의 대의를 보고 취지를 읽어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그 내용이라는게 암송할 때는 이미 그 실상이 아니며, 그 이름만 남아 부득이하게 우리가 인용하는 것일 따름이다. 까닭에 부처님처럼 100%로 아는 게 아니므로 생길 수 있는 잘잘못을 ‘남 탓’ 즉 ‘부처님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내 탓’으로 적기 위한 것은 아닐까?

누구도 남의 말을 100% 완벽하게 이해하고 암송할 수 없다. 앞으로 우리도 생활 속에서 ‘이렇게 말했잖아요?’가 아니라 ‘이렇게 들었어요’라고 하는 표현을 쓰면 어떨까? 같은 듯 전혀 다른 이 말의 의미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 염두에 두고 계속 화두처럼 남겨야 할 것 같다.

‘문(聞)’은 단순히 들었다는 청(聽)이 아닌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 가운데 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문은 경전을 귀로 들어서 통달하는 것이며 이에서 나아가 진리를 생각하여 마음을 두는[存心] 즉 앎이 사(思)이며 선정, 나아가 보시 등으로 잘 익히는 것인 수(修)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은 부처님의 지혜로서 계를 지니며 법의 뜻을 부지런히 구하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시는 불교수행 과정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시작인 ‘신’과 관련된 보다 큰 다른 의미로 보면 어떨까 싶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모든 불경의 첫머리에 사용된 여시란 말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불법의 대해(大海)는 믿어야 들어갈 수 있고 지혜가 있어야 능히 제도(濟度)한다. 여시란 곧 이 믿음이란 뜻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한번 쫓겨난 아난이 아라한이 되어 다시 가섭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과 대중들 앞에서 암송한 『금강경』은 이미 아난 혼자의 ‘들음’이 아닌 ‘대중’들 모두의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까닭에 내가 아닌 우리로 번역하면 어떨까? 까

닭에 여시아문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이와 같이 들었는데 걱정말고 청정한 신심을 내서 믿고 잘 따라 오셔. 그래야 더 잘 이해하기 쉽고 수행도 더 잘 될거야”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어떨까?

002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與大比丘衆天二百五十人俱(일시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부처님께서 한 때 사위국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에서 1250명이 나 되는 큰 비구 대중들과 함께 했다.”

서구의 육하원칙과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 경전에서도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전의 첫 문장의 내용이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형식을 정했다. 여시아문부터 이백오십인구(二百五十人俱)까지가 바로 그것으로, 석존의 가르침이라는 인증으로서 믿음의 신(信)성취인 여시, 아문의 문(聞)성취, 일시라는 시(時)성취, 설법하신 불(佛)은 주(主)성취, 장소의 처(處)성취, 청중인 중(衆)성취의 6가지를 말한다.

-선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