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가 “자기 한 사람만의 행복을 위한 길”, “세계 부정적, 세계 포기적인 도피적 신비주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대중성과 사회성이 허약하다는 심각한 공격들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사꺄무니 부처님 입멸 후 약 사백 년 간 부파불교의 분열상과 경직성, 반사회성, 열반·출가 지상주의 등 역사적 팩트를 고찰해보면 그 비판은 일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부파불교의 열반 지상주의라는 단면과 오로지 브라흐만으로의 복귀만이 진리인 것처럼 믿고 있는 사회 도피적 힌두교는 서로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부처님 재세 시대의 초기불교 혹은 근본불교의 진실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은 삶 자체를 “길(삶의 현장)” 위에서 완성했으며, 사성제(카스트)를 부정했고, 빈부 차별 타파 등 사회적 변혁을 지향했다. 정치·경제·사회 현상에도 깊은 통찰력을 보였다.

대승불교의 핵심적 담마인 육바라밀의 원형이 되는 팔정도와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초기불교 시대부터 존속해왔다는 것도 경전적 사실이다. 사무량심[慈悲喜捨]은 자비·동정·공감·평등(평온)이며 그 디테일이 팔정도(八正道)이다. 주역의 원형이정(元亨利貞)-춘하추동(春夏秋冬)의 원리와도 상통한다고 본다. 성리학의 인의예지(仁義禮智)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호 의존적(interdepen�dence)이므로 온갖 중생이 우주의 주인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사소한 존재라도 138억 년 전, 수소와 헬륨밖에 없는 우주 공간으로부터 진화해온 우주사적 연혁을 가지고 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생물이 무기물·광물질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것이 금강경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월과 열등의 개념이 아니고 다만 다르게 변화해왔을 뿐이다. 생명 활동이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존재들의 전부는 관계이다. 관계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관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진리가 사무량심이다. 코로나19는 사무량심의 원형적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지구별에서 인간은 차별화된 진화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 그 우월성의 핵심을 사무량심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괴질로 고통 받는 가족과 이웃,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고통에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동정과 공감을 갖는 한편 이념과 체제를 떠나 평등한 손길을 내미는 것이 불교의 정신 아닐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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