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극근의 선시

화두의 방편으로 이용되는 관념적 선시도 눈에 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다음의 시다.

우물 밑에서 진흙소가 달을 향해 울고

구름 사이 목마 울음 바람에 섞이네

이 하늘 이 땅을 움켜잡나니

누가 남북동서를 가름하는가.

井底泥牛吼月 雲間木馬嘶風

把斷乾坤世界 誰分南北西東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의 작품이다. 전호에 소개한 습득의 것과 마찬가지로 상식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읊고 있다.

원오 극근은 송나라 때 임제종 스님으로 성이 낙(駱)씨였고 이름이 극근이다. 어려서 묘적원 자성(自省)선사에게 출가하여 경론을 연구하였고 뒤에 오조법연 선사의 법을 이었다. 불안(佛眼)․ 불감(佛鑑)과 더불어 오조문하 삼불(三佛)로 불리었다. 후학들의 선지도를 위해 설두중현의 『송고백칙』을 제창하였고 이를 엮어 『벽암록』을 만들었다.

'진흙소[泥牛]'는 여기에서도 등장하는데 우리나라 선시에서도 곧잘 인용되는 시어다. 이 시는 『선문염송』제172번째 공안이다. 원오의 스승 법연선사가 어느 날 "비유컨대 소가 살창으로 지나간다. 머리와 사족은 모두 지나갔는데 왜 꼬리가 지나가지 못할까?"라는 질문을 대중 앞에 던졌다. 이 질문은 어떠한 지식인이라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고 또한 상식으로도 풀지 못한다. 결국 직접 부딪쳐 소와 한 몸이 되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하다. 일반인의 지식으로는 머리와 뿔, 사족이 모두 지나간 후에 꼬리라는 점에 추고(追考)해 소가 외양간을 통과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지식의 판단은 선리(禪理)와는 거리가 멀다. 선은 일반지식으로는 해결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지식은 선가에서는 버려야 할 지식 중의 하나다. 진짜 지식이 아니고 가짜 지식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물론 가짜라고 해서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게 아니고 진짜를 파악하면 가짜가 진짜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보자.

동서남북이라는 지식은 통념적 지식이다. 그렇게 인식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것일 뿐 그것이 진리이진 않다. 원래는 동서남북이란 없다. 그러나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 부르고 해가 지는 곳을 서쪽으로 부르자는 데 인식을 공유하기로 했기 때문에 동서남북의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가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원래는 동서남북이라는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당체는 이럴 때에야 드러난다. 그래야 '이 하늘 이 땅을 움켜잡는'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다. 원오의 이시는 그래서 선적 체험을 통한 관념적 의도가 짙게 배어있다. 다시 말해 관념의 깊은 인지와 해득이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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