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빳사나의 유익함

천을 문지르자 얼룩이 지면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쭐라빤타까는 생각했습니다. ‘이 천 조각이 전에는 아주 깨끗했는데 이제 더러워졌구나! 내가 이렇게 문지르니까 본래의 깨끗한 특성을

 

잃어버리고 더러워졌다. 그래!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은 변화하구나!’

쭐라빤타까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고 주시하면서 위빳사나 지혜를 키워나갔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쭐라빤타까 앞에 광명의 몸으로 나투어 말씀하셨습니다.

“때는 몸에 낀 때만을 말하지 않네. 때는 탐욕의 다른 이름. 탐욕이 없는 청정한 나의 교단에서, 비구들은 탐욕이라는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살아가네! 때는 몸에 낀 때만을 말하지 않네. 때는 분노의 다른 이름. 분노가 없는 청정한 나의 교단에서, 비구들은 분노라는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살아가네! 때는 몸에 낀 때만을 말하지 않네. 때는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 어리석음이 없는 청정한 나의 교단에서, 비구들은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의 때를 제거하며 살아가네!”

이 게송 끝에 쭐라빤타까는 사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고 삼장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쭐라빤타까는 결코 똑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위빳사나는 출가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두뇌가 명석한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잠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만큼 이익이고 그 유익함이 크기에 꾸준히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준비가 되셨는지요? 이제 여러분은 나 자신이라고 하는 몸과 정신에 대해서 깊이 있게 주시하고 통찰하는 명상으로 진입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위빳사나 명상의 근거가 되는 가장 중요한 경전인 대념처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살아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림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알아차림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이 말씀을 보면,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얼굴에 가려움이 일어났습니다. 사견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가려움’이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가려움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가려움이 ‘나 또는 나의 것’이라면, 그것은 내 뜻대로 ‘가렵지 말아라’라고 할 때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만약 ‘변화하지 말고 사라지지도 말아라’라고 한다면, 나 또는 나의 것이기에 변화하지 않아야 하고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변화하고 사라집니다. 이것은 즉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가려움’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견에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통증, 긴장, 가벼워짐, 편안함 등 모든 것에 해당합니다. ‘내 가려움’, ‘내가 가렵다’가 아닌, 단지 ‘가려움’이라고 알아차림 합니다. 단지 가려움이라는 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려움’이라는 명사형의 명칭을 마음속으로 반복하면서 주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명칭을 붙이면서 주시하면 그 가려움에 대한 주시를 더욱 잘 할 수 있고, ‘나의 가려움’이라는 무의식적인 생각과 반응을 넘어서서 단지 ‘가려움’이라는 현상으로 주시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이나 반응으로 옮겨가지 않고, 끝까지 제대로 주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명사형인 ‘가려움’이라고 마음속으로 반복하면서 주시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마하시 전승 위빳사나 ‘담마명상원’ 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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