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목련

 

구도도 형식도 없이

 

누군가 공중에 꾹,

 

주먹으로

 

붓글씨를 써놓았다

 

선지피 같은

 

낙관도 찍어놓았다

 

그래서 그럴까

 

홍심(紅心)에 놀란

 

새들이

 

자구(字句)도 읽지 못한다

 

홍심에 놀란

 

벌 나비도

 

가만 앉아

 

명상(冥想)하지 못한다

 

괜히, 내 마음만

 

붉다

 

오로지, 붉다

 

그녀 향해

 

그녀 향해

 

-그해 봄, 그녀와 나는 봄 소풍을 갔다. 모처럼 간 봄 소풍이었다. 앞쪽엔 강물이 흐르고 옆쪽엔 사람들이 붐비고 뒤쪽엔 개나리, 진달래, 철쭉, 벚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백목련과 자목련도 피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하다 그만 백목련 읽는 걸 놓쳤다. 그녀가 열심히 읽고 있는 백목련을 내가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순간, 그녀가 화를 벌컥 냈다. 지금 뭐 하냐고. 정신을 어디다 쓰고 있냐고. 기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다음에 이어질 우리들 여행 코스를 찾고 있었는데, 거기에 팔려 ‘함께와 나눔’이라는 소중한 행복을 잊고 나는 그만 ‘꽃과 꽃을 읽고 있는 그녀’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녀의 폭발을 한동안 묵묵히 받아주었다. 어색하고 쑥스러운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가 다시 폭발 이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온전히 되돌아오기에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아까 보았던 자목련이었다.

백목련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자목련. 그 그늘로 옮긴 우리는 자목련깊이 읽기를 시작했다.

구도(構圖)도 없이 누가 이렇게 잘 구도(構圖)해 놓았을까. 형식도 없이 누가 이렇게 형식을 잘 잡아놓았을까. 주먹처럼 허공에 쓰여 있는 그 붉은 붓글씨 앞에서, 그 붉음에 놀라 새들도 자구(字句)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그 붉은 붓글씨와 낙관 앞에서 우리 마음은 자동으로 녹아내렸다. 붉음에 놀라 벌 나비도 가만 앉아 명상(冥想)하지 못하는 그 자목련의 홍심(紅心) 앞에서 우리는 사랑과 명상의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고 다독여주었다.

오직, 사랑일 뿐이었다. 붉은 사랑일 뿐이었다. 자목련처럼 붉은, 홍심의 사랑일 뿐이었다. 이벽(시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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