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그립다. 주지 스님은 외삼촌이었다. 절로 가는 길은 사랑과 그리움이 깊어가는 길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산사로 가는 길은 계곡과 도랑 건너 산길을 돌고 돌아갔다. 대웅전은 동백 숲으로 둘러싸였고 나는 동백 꽃잎을 빨아먹거나 동백 떡을 따먹곤 했다. 새소리, 물소리, 목어소리, 독경소리가 하모니를 이룬 산사는 초등학교 소풍 명소였고 마을 주민들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도량이었다.

동네 사찰인 탓에 복전함의 지폐보다 쌀이 많이 쌓였다. 돈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은 부처님오신날이었는데 연등행사가 끝난 어느 날, 스님은 복전함을 열어 마을로 내려갔다. 그날은 엿장수가 후미진 산골 어촌을 찾는 날이다. 스님은 엿판을 사들여 동네 아이들을 찾아 나섰고 조무래기들은 물가며 ‘맷둥’에서 놀다가도 스님 얼굴을 발견하면 오늘이 그날임을 알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늘 그런 스님이 고마워 집밥 공양을 했다. 어스름이 마을을 적셔갈 즈음 스님은 어르신들 온정만큼 약주에 취했는데 가로등도 없는 고불고불 가파른 산등성이를 잘도 넘어 가셨다.

지난달 원래 부처님오신 날, 나는 섬 여행을 떠났다가 스님이 못내 그리워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법주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다. 맑디맑은 시냇물에는 피라미 떼가 자유롭게 유영하고 자라도 함께 서식했다. 절로 가는 자연관찰로는 시골 숲길을 그대로 재현했다.

새소리, 물소리에 취해 절로 가는 길은 사랑과 기쁨이 절로 깊어갔다. 산사는 봉축행사를 연기한 탓에 더 고요하고 적막했다. 산문에서는 방문객 발열체크와 마스크 착용을 권고했다. 깜박 잊고 마스크를 가져오지 못한 탐방객에게는 마스크를 무료로 나눠줬다.

문득, 타인을 배려하는 불교적 사랑 앞에서 그동안 우리 불교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법회 전면취소와 행사연기 등 선제적 조치를 취하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우리 국민들은 불교의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에 대한 지속적인 실천을 바라보면서 왜 불교가 민족종교이고, 호국불교인가를 다시금 확인하고 깨달았다.

승려 5천여 명이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키로 결정한 것도 종교계 기부결정의 첫 공식 사례다. 이런 모습은 일부 종교가 사회적 갈등과 아픔을 치유는커녕 분열과 증오의 바이러스를 전도하는 행태와 크게 대비된다. 구약성서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라는 말씀마저 거역하고 반역하는 행태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

진정한 종교의 역할은 사랑과 나눔, 배려와 포용의 실천이다. 종교는 백성이 어렵고 힘들 때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지혜로운 에너지의 충전소여야 한다. 빅토르 위고는 “사랑이란 상실이며 단념”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타인에게 주었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 삶도 종교도 생명력의 근원은 사랑이다. 모든 일은 거기에 사랑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허할 뿐이다.

그렇게 종교는 성스러움과 거룩함으로 존재한다. 불교는 성스럽고 거룩하면서도 ‘속스러움’과 구분하지도 않는다. ‘있고’ ‘없음’이 따로 없다. 평등과 균형의 원리가 작동한다. 모든 생명이 불성을 지녀서 수행을 통해 곧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부처와 못 깨친 중생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역설한다.

법주사 대웅전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눈물짓는 이유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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