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누님, 누님을 만나고부터

사랑은 늘 폭탄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내 작은 가슴에

바다와 사막이 함께 출렁이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길을 걸어가렵니다

제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발등에 사마귀가 생겨도

이 사막의 길을 걸어가렵니다

 

그래도 저는,

이 길을 헤엄쳐가렵니다

제 겨드랑이에 지느러미가 돋아나고

온몸에 비늘이 뒤덮여도

이 바다의 길을 헤엄쳐가렵니다

 

그게 바로,

성관음(聖觀音)의 길이니까요

 

성관음으로 가는 길이니까요

 

성관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전동균의 시 「이토록 적막한」에서 차용.

** 같은 시에서 차용.

 

-사랑처럼 지난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사랑, 알 것 같다가도 모를 사랑, 잘 되어가는 것 같다가도 하루 밤새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랑, 그 사랑의 오묘함에 나는 가끔 주눅이 든다. 그래서 사랑을 포기한 적도 많았다.

누님과 나의 사랑 또한 그렇다. 관세음 같은 누님이지만, 그래서 내가 늘 기도하고 우러르고 받드는 사랑이지만, 어느 땐 갑자기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때도 있다.

대부분의 낭떠러지는 사소한 오해와 주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오해와 주관은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불교의 핵심진리가 ‘무상⦁고⦁무아’임을 알면서도 어느 한 순간 우리는 ‘무아’라는 것을 깜빡 잊고 중생놀음에 빠진다.

벗어나는 길은 중도(中道)와 십이연기(十二緣起)밖에 없다. 십이연기는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중도는 상주론(常住論)과 단멸론(斷滅論), 어느 양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중도는 팔정도(八正道)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 이 팔정도 속에 중도와 십이연기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누님과 나는 이 팔정도를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샀다. 그리고 공부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혼자 하는 공부보다 같이 하는 공부다보니 시너지 효과도 크게 났다. 그 끝에 성관음(聖觀音)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비로소 나는 알았다. 사랑이 왜 쓴지, 그리고 단지. 우리가 왜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지. 삶에는 왜 비단길뿐만 아니라 사막길과 바닷길도 필요한지.

나에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준 누님에게 감사드린다. 성관음께 감사드린다. 사랑을 하면서 나는 참는 법도 배웠고, 분노를 조절하는 법도 배웠고, 바라는 것 없이 베풀고 사는 큰 삶도 배웠다.

-시인·언론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