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불교의 태동과 경운 원기①

입적할 때까지 ‘수행’을 게을리 않고 제자들에게도 ‘수행’ 강조
선암사의 오랜 강학전통과 선교학의 종장들 학덕 그대로 전수

Ⅰ. 머리말

경운 원기(1852~1936)는 한국의 전통불교를 계승하고 근대불교의 서막을 연 대표적 인물이다. 당대의 지성이었던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은 ‘일대의 의호(義虎)’라고 했고, 정인보(鄭寅普, 1893~?)는 ‘영원한 후학들의 길잡이’로 칭송하였다. 그런가 하면 당시 조선의 선사(禪寺)에서 수행 중이었던 일본인 소마(相馬勝英)조차도 경운을 “결연하게 반도불교의 특징을 보호 유지해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경운 원기는 제자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이 “의해(義解)가 드넓고 계행이 엄밀하다.”고 평가할 만큼 한국불교의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명확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경운 원기는 선․교학뿐만 아니라 염불과 계율에서도 한국근대불교계를 대표하고 있다. 흔히 강백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법명 앞에는 ‘화엄종주’, ‘대선사’, ‘지계제일’ 혹은 염불결사의 창시자인 혜원(慧遠)과 비견되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 불교계에 유행한 선교학의 연찬과 강회, 그리고 염불과 계율이라는 삼문체계를 계승하고 있었다.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상월 새봉(霜月璽葑, 1787~1767)·침명 한성(枕溟翰醒, 1801~1876)과 함명 태선(函溟太先, 1824~1902)·경붕 익운(景鵬益運, 1836~1915)으로 이어지는 그의 법맥은 선교학과 더불어 백련결사를 결성하고 계단을 설치하여 엄정한 수행의 덕목을 실천하고 있었다. 한편 경운 원기는 격변하는 근대불교의 한복판에 있었다. 원종·임제종·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민족 불교를 위한 교단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였다. 또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7년 동안 각황사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경운 원기의 전통불교 계승과 근대불교의 체계 확립을 위한 노력은 후학들에게 이어지기도 하였다. 영호 ․ 정호 · 진응 ․ 혜찬 · 금봉 ․ 병연 · 철운 ․ 종현과 같은 인물들은 경운의 학문과 수행을 이어받아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후학양성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경운 원기는 불교가 탄압받아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 말기와 일본의 한국불교지배와 독자적 중흥을 위한 민족불교의 한복판에서 그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경운 원기에 대한 불교계와 학계의 관심은 그동안 소극적이었다. 2013년 경운을 조명하는 첫 학술회의가 열렸을 뿐 그의 사상과 행적은 적지 않은 근대불교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과 가치에 대한 규명이 변변치 못했다. 다행히 2016년 신규탁이 『화엄종주경운원기대선사 산고집』을 간행하였다. 『산고집』은 철운 조종현 · 정인보 · 박한영이 찬한 행장과 비문, 경운의 편지를 포함한 유고, 정인보, 최남선, 일본인 소마를 비롯한 당대 지성들이 경운의 학덕과 수행, 그리고 신앙을 기리는 글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산고집』의 간행은 경운 원기를 통해 한국불교의 전통과 근대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2018년 10월 한국동양철학회가 주관한 학술회의는 경운 원기의 사상과 가치를 체계화시키고,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글은 우선 19세기를 살다 간 경운의 행적을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경운 원기는 입적할 때까지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후학들에게도 ‘수행’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선암사를 중심으로 한 역대 종장들의 준엄한 가르침을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선교학과 계율, 백련결사에 대한 검토는 경운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국불교 중흥의 근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학덕을 계승했던 제자와 동시대 지성들의 경운과의 인연은 단순한 교유가 아닌 근대불교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Ⅱ. 한국불교의 변화와 경운의 생애

경운 원기는 서세동점의 서막이 시작되는 1852년(철종 3) 정월 3일 경상도 웅천에서 태어났다. 1868년(고종 6)에는 구례 연곡사 환월(幻月)의 제자가 되었으며 출가 이듬해인 1869년에는 당대 불학의 중심지였던 선암사 강당에 들어가 경붕 익운의 제접 하에 불법을 전수받는다. 그 후 구암사로 가서 백파 긍선의 제자인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9)에게서도 경학을 배웠다.

선암사 부도전. 좌측에서부터 화산 스님 사리탑, 침명 스님 비, 상월 스님 비, 벽파 스님 비(뒤쪽), 함명 스님 비, 경붕 스님 비, 경운 스님 비, 금봉 스님 비, 운악 스님 비, 용곡 스님 비.
선암사 부도전. 좌측에서부터 화산 스님 사리탑, 침명 스님 비, 상월 스님 비, 벽파 스님 비(뒤쪽), 함명 스님 비, 경붕 스님 비, 경운 스님 비, 금봉 스님 비, 운악 스님 비, 용곡 스님 비.

 

월저 도안(月渚道安)은 가까이로는 청허 휴정을 계승했고 멀리로는 태고 보우의 전법을 계승하였다. 상월 새봉의 법석이 소문나 지금에 이르도록 더욱더 번창하였으니 순조와 헌종 시대에 순천 선암사에 주석했던 침명 한성과 순창 구암사의 백파 긍선은 모두 불문의 으뜸이었다. 침명이 입적한 후에는 함명 태선이 그 법을 이어 흥성하였다. 그리고 함명의 법을 이었던 사람은 경붕 익운이었는데, 경붕은 오랫동안 대승암에 주석하였다. <정인보, 「화엄종주경운당대사비」, 『산고집』>

경운은 법맥상으로는 함명 태선의 손제자이고, 경붕 익운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다. 박한영은 함명 태선을 “마치 금산(金山)과도 같아서 자황(雌黃)으로는 가히 범접하기가 어려웠다”고 했으며, 경붕 익운을 “마치 깊은 산속의 나무에 핀 꽃과 같았고 가릉빈가 노래처럼 청아하시다.”고 하여 선암사 승려들의 학덕을 기렸다. 선암사는 구암사 · 선운사 · 대흥사와 함께 조선시대 강회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특히 화엄강회는 팔도의 승려들이 운집할 정도로 명망이 있던 곳이다. 이와 같이 경운은 선암사의 오랜 강학전통과 역대 선교학의 종장이 지닌 학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1881년(고종 18) 경운은 중망(衆望)의 추대를 받아 스승 경붕에게 강석을 물려받았다. 경운이 아끼던 손제자 조종현에 의하면 “교연(敎筵)을 주관하게 되니 정성스럽고 자비로운 교회(敎誨)는 일세를 풍미하여 배움에 뜻을 둔 자가 발꿈치를 잇고, 그 명망을 우러러보는 자가 몸을 엎드리니 천고의 법등이 이 땅에 다시 뿌리내렸다.”고 한다. 1898년(광무 2) 경운은 17년 동안 유지하고 있던 법통을 제자 금봉 병연에게 물려주었다.

옛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였다면 자우(子羽) 같은 인물을 잃을 뻔했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문장과 글씨 두 가지 다 갖춘 사람은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스님은 둘 다 잘하였으니 ‘으뜸이며 기이한 인물(元奇)’이라는 법명을 가진 것은 미리 예언하여 붙여진 이름처럼 자연스럽다. <범해 각안, 「경운강백전」, 『동사열전』>

범해 각안은 경운의 문장과 글씨를 두고 칭송하였다. 즉 경운은 “강학은 3대에 전하여 솥의 세발처럼 자처했고, 필명(筆名)은 일신만이 홀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운은 1880년 29세 때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통도사에서 3개월 동안 금자『법화경』을 서사하였다. 『법화경』 사경 뒤에 발문을 쓴 이능화는 “명성황후가 중생이 도탄에 빠져 있음을 살펴 대비심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당시 명성황후는 서구열강의 문호개방 압력, 개화정책 추진으로 인한 내외갈등의 확대 등으로 인해 열세에 처해 있었다. 경운은 1897년 4월부터 5년 동안 선암사 비로암에서 『화엄경』을 서사하기도 하였다. 경운의 부탁으로 사경에 서문을 쓴 권중현은 “그 필법은 힘차고 굳세며, 그 규모는 너무도 치밀하고 촘촘하다.”고 했으며 매천(梅泉) 황현(黃玹)도 “정밀하고 훌륭하여 비교가 안 되니 보는 사람마다 귀신의 솜씨인가 의심한다.”고 칭송하는 등 당시 궁궐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경운은 세간의 칭송에 무심하여 고종이 자주 물품을 보내주었지만,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화엄경』 서사 당시 경운이 1행 1배, 1자 1호불 한 것으로 보면 그의 문장과 글씨는 수행의 결과였고, 그 역시 수행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한편 1900년대 초반부터 경운의 행보는 밖으로 향했다. 1895년 승려도성출입 해금 이후 한국불교계는 격랑을 타고 있었다. 한국불교의 중흥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 그리고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한국불교지배, 민족불교진영의 저항 등이 연속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관리하기 위해 원흥사를 중심으로 한 대법산제도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1908년에는 원종 종무원이 설립되어 교단의 확립과 수행과 포교를 중심으로 한 불교 부흥을 위해 진력하였다. 당시 각도의 사찰대표 52인이 개최한 총회에서 경운의 제자인 영호 정호와 진응 혜찬은 각각 교무부장과 고등 강사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원종은 훗날 조동종맹약으로 친일적 성향으로 변질되었지만, 원종설립의 과정과 그 참여인물을 보면 오랜 세월 해이해진 한국불교의 법과 기강을 바로잡고, 중흥을 목적으로 하였다. 예컨대 원종의 전신이었던 불교연구회가 “불교의 오묘한 이치와 신학문, 다른 종교의 책 및 다른 나라·다른 풍속의 산수와 언어 등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을 보면 경운의 가르침을 받은 불교계의 학덕있는 인물들이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결국 경운은 동시대 한국불교계가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를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중흥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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