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진료 간다
보리밭 지나
유채꽃 밭 지나
벚꽃나무 그늘 지나
산다화 꽃 한 송이 꺾어 들고
봄 진료 간다
어느 스님이 내버려두고 갔을까
와선(臥禪)하듯 쓰러져
혼자 기도하고 있는
산골 암자
내 누님 같은 암자
묘지석 지나
너럭바위 지나
산 개울 건너
산봉우리 넘어
왕진가방 매고
봄 진료하러 간다
아직 안 핀 내 봄꽃
꽃 피러 간다
내 누님 만나러 간다
-그해 봄, 나는 젊은 날의 지병이 도져 많이 아팠다. 모 대학병원에 입원해 여섯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퇴원 뒤의 삶은 걷는 날보다 누워있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죽음 직전의 삶, 그때 누군가가 일러주었다. “와사보생(臥死步生)”이라고. “누워 있으면 죽고 걸으면 산다”고.
어느 날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나는 가까운 산으로 갔다. 그리고 올랐다. 마침 길가에 산다화가 피어 있었다. 붉어서, 내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나는 그 붉음 하나를 꺾어들고 내 붉음을 찾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다 폐사(廢寺) 한 채를 만났다. 어느 스님이 살다 갔는지, 폐사된 암자지만, 먼지만 닦아내면 금방 살아도 될 만큼 단아했다.
문득, 오래 만나지 못한 누님 생각이 났다. 누님이기도 하고 연인이기도 하고 관세음보살이기도 한 누님 생각이 났다.
간절한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숨고 싶은 그리움이기도 했다. 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기에.
나는 누군가의 묘지석(죽음)을 지나, 너럭바위(이승)를 지나, 산 개울(사성제)을 건너, 산봉우리(삼법인)를 넘어, 왕진가방(팔정도)을 매고, 봄 진료(위빳사나)를 하며 갔다. 아직 안 핀 내
안의 봄꽃이 보였다. 누님이었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은
내 관세음보살이자,
애인이자
뜨거움입니다.
그 뜨거움 속에서만
나는 꽃입니다.
비로소,
시인입니다.”
이벽(시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