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석 근대선암사와 그 학풍 4

상월 새봉도 이론 내세워 유교와 불교 회통 시도
새로운 시대 맞아 민중 계도할 실천적 활동 전개

2. 유불회통과 현대화에 적응하는 전통

조선 후기 불교계에는 선학이나 화엄학의 이론을 토대로 유교와 불교의 회통(會通)을 강조하는 주장이 대두된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억불정책으로 침체되어 있던 교세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물론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유교적 입국을 강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를 핍박하게 되자 그에 대한 반발이 불교계 안팎에서 일어나게 된다. 실권을 장악한 성리학자들과 정면으로 대립할 수 없었던 승려들은 과거부터 있어왔던 유불회통론(儒彿會通論)을 통해 본질적인 동일성을 주장하며 탄압의 고삐를 늦추고자 했던 것이다. 유교와 불교의 회통이나 융합, 혹은 본질적 차원에서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이론은 이미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등장한다. 즉 도생은 불성(佛性)이나 일승(一乘)을 이(理)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현학(玄學)의 태극(太極)이나 도(道)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유식사상의 소개와 화엄사상의 전개, 그리고 선종의 발전은 도(道)나 이(理)의 개념 대신 심(心)이나 일심(一心)이란 용어로 대체한다. 송대의 성리학은 오히려 불교의 유식사상이나 화엄학 내지 선학의 사상적 영향 속에서 성립했다는 기존의 연구결과에 의거한다면, 유교 내지 성리학과 불교는 이미 사상적으로 회통 내지 그러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보아야만 한다. 현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교독존주의에 직면한 불교의 융화적 자세, 나아가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따른 유교와 불교의 문화적 융합과 재창조, 현상의 차별을 초월해 존재하는 근원적인 통일성 내지 원만성의 인식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성도 있다.

문화사상적인 배경은 여하튼 불교와 유교의 회통에 대한 주장은 이미 그 연원이 오래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함허 득통을 비롯해 서산 휴정의 삼가동근론(三家同根論) 등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연담 유일(蓮潭有一)과 인악 의첨(仁嶽義沾)은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주장한 승려들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학승들 역시 이교(二敎)의 회통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선암사를 대표하는 고승들의 이교회통론과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고승 중에서 이교회통론의 선봉은 상월 새봉이라 말할 수 있다. 상월 새봉은 “유가에서 말하는 미발기상(未發氣像)은 불가의 여여리(如如理)이다. 이른바 태극은 우리 불가의 일물(一物)이다. 이른바 이일분수(理一分殊)는 우리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증(引證)하면 전후와 상하에 일관(一貫)하는데 어찌 유석(儒釋)의 차이가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상월은 태극과 일물, 이일분수와 일심만법을 대비시켜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해붕 전령 역시 불교, 유교, 노장의 회통을 주장한다. 『동사열전』에 의하면 그는 “공자는 내방(方內)의 성자(聖者)이고, 노자(老子)는 방외(方外)의 선자(仙者)이며, 부처는 방내외(方內外)의 불자(佛者)라 전제”하며, 유불도 삼교의 설을 광범위하게 섭렵한 학문적 바탕 위에서 “하늘이 부여한 것은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 하늘이 부여한 성을 불교에서는 확 트인 부처라 하는 것이다. 하늘이 부여한 확 트인 부처의 속성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걸림이 없지만 인정에 뒤덮인 것이 마치 구름이나 안개가 맑은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장경을 설하시어 모든 사람의 가려져 있는 인정(人情)을 제거하고 확 트인 천성(天性)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유불도 삼교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성이란 단어로 파악하고, 그 단어를 통해 삼교의 회통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교의 궁리진성(窮理盡性), 도교의 수진연성(修眞練性),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의 성은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해붕의 이상과 같은 의식은 그의 스승인 묵암 최눌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묵암 최눌 역시 「폐지상소(廢紙上疏)」를 통해 불교의 처지와 부당한 대우, 과중한 부역 등에 대해 13가지 조목을 들어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운 원기 선사에게 고종 황제가 준 쌍룡문 가사.(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경운 원기 선사에게 고종 황제가 준 쌍룡문 가사.(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동시대에 백곡 처능이 작성한 「간폐석교소」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유교와 불교는 하나의 도로 통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귀천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유석의 교유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창려(昌黎)는 태전(太顚)에게 옷을 남겨주었고, 동파(東坡)는 불인 선사(佛印禪師)에게 띠를 풀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 근래의 일을 말하면, 회당 대사(晦堂大師)는 친히 풍원군(豊元君)의 당(堂)에 올랐고, 영해 법사(影海法師)는 귀록옹(歸鹿翁)의 문(門)에 글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 예입니다. 산인(山人)을 혜원이 아니라고 해서 물리치지 않는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라 말한다. 유석이 교유했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유석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교적인 세계관에 의거해 융합과 상생의 의식을 드러낸다.

“골짜기 하늘 아래 서로 만나 이야기 할 때/ 종일토록 온화하여 세속인연 멀어졌네. 유석이 다른 길로 나뉘었다고 누가 말했나/ 함께 형적(形跡)을 잊으면 같은 곳에 이른다네.”라고 말한다. 형상의 차별에 의거하지 말고, 두 가르침이 추구하는 본질적 바탕 위에서는 귀착지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 두 가르침의 회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침명 한성의 전기에서는 유석의 회통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법제자인 함명 태선에게는 이교(二敎)의 회통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도 함명의 전기가 아니라 그의 비명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단편적이지만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비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 선사는) 두루 유학의 성리(性理)와 고금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에 대해 통달하였다. 일찍이 ‘유교의 지(智), 인(仁), 용(勇)은 곧 불교의 비(悲), 지(智), 원(願)이다. 불교에는 삼보가 있는데 이는 일찍이 전해오는 삼강령(三綱領)에 가깝다. 불교에는 오계가 있는데 추경(鄒經 맹자의 가르침, 즉 유교)의 사단(四端)과 성실(誠實)의 신(信)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비명을 쓴 여규형은 “학문이 미천한 자들이 서로 다투니 이것은 성인의 진면목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대개 선인들이 개발치 못한 탓이다. 나는 유자이지만 불교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비명에 나오는 내용은 마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초기의 격의불교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표현상의 문제를 떠나 이교의 회통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승지라는 벼슬을 한 여규형의 말처럼 천견미학(淺見末學)의 무리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분란을 조장할 뿐인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개되는 조선 말기의 사회 역시 사상적으로 전환의 시기 내지 혼돈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성리학에 대한 절대적 시각이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추사나 다산, 혹은 이건창이나 여규형과 같은 많은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지니는 시기이기도 하다. 천주교나 서양과학문명의 전래, 실학의 대두 등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연담, 인악과 같이 유석의 회통을 주장하는 소리도 개항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삼교정립(三敎鼎立)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서양의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교단 자체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도 일대 혁신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양의 습득,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적응의 문제 등은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다가왔다. 경붕 익운이나 경운 원기, 금봉 기림과 같은 강백들은 이러한 시대사조와 함께 혼돈의 시대를 유영(遊泳)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확하게 이교회통에 대한 입장을 천명하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사조에 적응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이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는데 몰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화엄이나 선학의 이론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였다. 경붕 익운이 내외의 서적을 두루 읽고 불교에 몰두했다는 비명(碑銘) 속의 표현에는 이미 유교나 노장에 관련된 기본적인 교양서적을 탐독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암사의 학풍이자 당시의 일반적 흐름이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교회통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이교회통에 대한 언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경붕의 제자인 경운 원기가 계율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혹은 송광사와 손잡고 순천에 도심포교당을 개설하는 일, 이회광의 원종에 맞서 조선불교임제종을 결의하고 관장에 선출되는 일, 서울에 각황사(지금의 조계사)가 건립되자 포교사가 되어 상경하는 일 등,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운 원기의 제자인 금봉 기림 역시 유학자들과 교유하는 한편으로, 27세 때인 1895년 대승암에서 개강하여 10여 년 교편을 잡는 일이나 1914년 순천군 선교양종강연소 포교사를 겸임하는 일 등으로 나타난다.

20세기를 전후로 시대적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사안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교회통(二敎會通)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사조를 선도하는 일에 경도되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1906년 설립하여 운영해 오던 선암사승선학교를 개편하게 된다. 1913년 선암사에서 운영하던 보통학교와 전문강원이 각각 2곳이나 운영되고 있었으며, 1914년에는 광주부에 포교당을 건립하게 된다. 1917년 당시 선암사의 본말사에서 양성하고 있던 학생수는 모두 65명이었는데 지방학림 학생 20명, 불교전문학생 10명, 보통학교 학생 35명

등이었다. 변화된 시대사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암사 승려들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화엄과 선, 염불, 유교 등을 고집하지 않고 본질을 추구하는 선암사의 실용적인 학풍이 20세기에 적응해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표출된 것이다.

Ⅳ. 맺는말

이상에서 선암사의 학풍과 그 전개과정을 고찰했다. 태고 보우를 시발점으로 삼아 전개되는 법맥은 부용 영관에 와서 부휴와 청허의 양대 계열로 분파되며, 청허계열은 다시 편양 언기와 소요 태능의 두 계열을 중심으로 선암사의 법맥과 강맥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법맥을 중심으로 청허파가 선암사를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학문적인 접근이라 밖에 말할 수 없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구도자들의 열정은 법맥과 강맥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재동자와 같이 무수한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사상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선암사를 주도한 고승들의 구도행각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는 계열이 다른 스님이라도 거리낌 없이 초빙하여 학생의 지도를 맡기게 되었다.

선맥(禪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오도(悟道)의 인연을 함께 하는 스승을 법사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고승들의 삶 자체가 융회적(融會的)이었으며, 걸림없는 무집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암사는 화엄과 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조불교의 전통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으며, 이교회통론을 당연시하는 고승들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혹 이조의 유교입국에 따른 자위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두 가르침은 회통의 여지가 많다는 점에 동의했던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이미 현학과 불교의 융합, 격의불교의 전개, 성리학의 탄생과정에 미치게 되는 불교의 영향 등에서 본다면 회통론의 등장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교회통론이 단순히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승려들의 자구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 고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불교라는 종교가 지향해야할 대중화라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화엄과 선, 염불의 융합이며, 진여심과 중생심의 이해를 둘러싼 심성론에 관한 논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 선암사의 학풍은 전통과 근대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교의 전래, 근대문명의 유입 등은 기존의 불교계에 던져진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조선불교 전체의 교단조직의 정비, 외세의 침략에 따른 전통의 보호와 적응, 유교적 가치의 퇴조와 그에 따른 포교방법의 변화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선암사를 고집하지 않고, 송광사와 손잡고 새로운 교육시설이나 포교소, 포교사 양성 등에 나서게 된다. 무집착의 가풍 속에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암사는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과거의 활발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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