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내면 담백 표현
무심과 유심 다르지 않아
시적 운율과 리듬도 살려

-우두법융의 오도송

선사들의 오도는 대부분 자연과의 합일 상황에서 주어지는데 그렇지 않고 깨달음의 내면을 담담하게 일깨우는 오도시도 눈에 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7)의 오도시다. 법융은 20년간 숲 속에서 묵좌(黙坐)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선풍은 우두선(牛頭禪)이라 불리며 삼론적(三論的) 요소가 짙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절히 마음을 쓰려할 때는

적절히 무심을 쓰라.

자세한 말 명상에 지치게 하고

바로 설하면 번거로움 없나니

무심을 적절히 쓰면

항상 쓴대로 적절히 무되리

그러기에 이제 무심 설해도

유심과 전혀 다르지 않으리.

恰恰用心時 恰恰無心用

曲談名相勞 直說無繁重

無心恰恰用 常用恰恰無

今說無心處 不與有心殊

앞에서 살펴본 다른 오도송과는 달리 '깨침의 미학'이 될 만한 소재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연의 서정물이 없어 자칫 딱딱함마저 안겨준다. 그러나 시적 운율과 리듬을 간결하게 살리면서 전하고자 하는 무심의 법문을 속도감 있게 던져주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시는 깨달은 이로서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用心]’ 하는 문제를 가르쳐주고 있다. '마음을 쓰려거든 무심(無心)을 쓰라'는데 그러면 무심은 어떤 상태인가. 나무토막이나 돌멩이 같은 사물이 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각도 없고 청각도 없으며 응대할 대상도 없고 촉감도 없다. 한 마디로 정신작용을 못하는 사심(死心)이 무심인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무심이란 이와 다르다.

진정한 무심이란 분별하되 분별한다는 의식이 없는 것이며, 그 분별한 내용에 구애받거나 끌려 다님이 없는 마음이다. 이러한 단계야말로 진여를 맛볼 수 있는 깨달음의 속성이며 바탕이다. 법융이 말하는 무심은 바로 이런 무심이다. 다시 말해 유심과 분별되는 무심이 아니며 유심과 다르지 않은 무심이다. 나아가 무심 자체까지도 무심하게 넘어서는 무심이다.

이러한 무심이기 때문에 '적절히 쓰면 쓴대로 적절히 무가 되는' 것이다. 무심은 과학에서 말하는 질량의 법칙에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럼으로써 우두법융의 깨달음이 던져주는 또 다른 그만의 독특한 맛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불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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