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골목, 이렇게 흰 눈 가득 쌓이는 날이면, 2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날, 보았던, 당신의 큰 눈동자가 생각납니다 그날, 당신은 큰 눈동자 가득 대설(大雪)을 담고 왔지요 대설 같은 큰 순결 담고 왔지요 그 대설에 나 얼굴 파묻으며 오래 눈물 흘리고 싶었지요 살얼음 같은 첫사랑, 하고 싶었지요 심장 쿵쿵, 수류탄 같은 첫사랑, 하고 싶었지요 먼 세월 지나도록 당신은 아무 말씀 없으셨지요 고사(古寺)처럼 적막했지요 나는 날마다 법당에 올라 기도했지요 우리 첫사랑 이루어지길, 우리 대설 녹지 않기를, 그때마다 탱화 속에서 연꽃 피어났지요 연꽃 속에서 당신 걸어나왔지요 조흔색처럼 걸어나왔지요 흰 소처럼 걸어나왔지요 수레 끌고 걸어나왔지요 그 수레 타고 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요 피리 불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대설 녹고 녹아, 나 알았지요 당신이 내 환생이었음을, 숙업이었음을, 담즘이었음을, 2월, 그날처럼 골목골목, 이렇게 대설 가득 쌓이는 날이면, 흰 눈 가득 퍼붓는 날이면, 황소처럼 큰 당신의 흰 눈동자가 생각나는 날이면 흰 소가 생각나는 날이면, 골목골목, 흰 소가 수레 끄는 날이면,

그 2월은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정말 눈동자 가득 대설(大雪)을 담고 왔었다. 아니, 대설처럼 넓고 깊고 적막했다. 첫눈에 나는 그 속에 빠졌다.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는 나고, 너고, 우리, 모두일 수 있다. 그녀는 또한, 나의, 여래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일 수도 있고, 천년 애인일 수도 있다.

이 시는 내가 썼다기보다는 그녀가 준 시였다. 그녀가 저절로 보내준 시였다. 대개는 시가 저절로 오지만, 이 시는 ‘그녀’라는 타인을 통해 저절로 온 시였다. 나는 거기다가 ‘흰 소’와 ‘수레’와 ‘연꽃’과 ‘환생’과 ‘고사(古寺)’와 ‘피리’ 등 불교적 상상과 ‘심우도(尋牛圖)’ 이야기를 조금 버무렸다. 그리고 이 시를 내 마음속 첫사랑에게 바쳤다.

시를 다 쓰고 나니, 정말 눈이 왔다. 그녀와 함께 정말 하염없이 그 눈길을 걷고 싶었다. 그 화엄(華嚴)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같이, 죽고 싶었다. 그리고, 죽었다. 그날 밤, 부처님의 원광(圓光)이 내 꿈자리를 비췄다.

이벽(시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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