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법손들2
①환암혼수(환암혼수, 1320~1392)

수행자들이 사치·향락에 빠져
정도전이 『불씨잡변』통해 비판
유학자들 중심으로 비난 확산
혼란스러운 시기 환암 등장

1390년 가을 9월 10일. 고려의 공민왕이 즉위한지 20년째 되던 해다. 불심(佛心)이 깊은 왕이 나옹(懶翁)화상이 머물고 있는 광명사(廣明寺)를 찾았다. 절에서 그동안 수행하고 있던 스님들의

 

공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공부선(功夫選)이다. 나옹은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고금의 격식을 깨뜨리고 범성凡聖의 자취와 유래를 다 쓸어버린다. 납자의 목숨을 끊고 중생의 의심을 떨어 버린다.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은 손아귀에 있고 신통 변화는 기세에 있으니, 삼세三世의 부처님이나 역대의 조사님들이나 그 규범은 같도다. 이 법회에 있는 여러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 그대로 대답하시오.

나옹의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는 스님은 없었다. 어떤 이는 몸을 구부리고 땀을 흘리면서 “모른다.”고 했고, 어떤 이는 이치에는 통했지만, 일에 걸리기도 했고, 어떤 이는 너무 격렬하여 실수하기도 했다. 왕이 서운한 기색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환암이 나옹 앞에 나가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을 물으니 막힘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옹은 흡족해하며 회암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마치 혼란한 고려 말기 불교계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불법(佛法)을 면면히 계승하기 위한 수행은커녕 승풍(僧風)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원나라가 고려를 점령하고 간섭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권문세족이 토지를 소유한 것이 극도로 심해지고 있었고, 백성이 정처 없이 유랑하고 노비가 급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심화되고 있었다.

불교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토지소유와 상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출가자와 소속 노비가 급속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금을 걷을 수 있는 토지가 줄어들고 백성들이 대거 출가하여 노비로 전락하여 국가의 재정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오늘날에는 저들이 화려한 전당(殿堂)과 큰집에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하기를 왕자 받듦과 같이하고……갖가지 공양에 음식이 낭자하고 비단을 찢어 불전(佛殿)을 장엄하게 꾸미니 대개 평민 열 집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온통 소비한다.

-정도전(鄭道傳)의 불씨잡변(佛氏雜辨)중에서-

더욱 큰 문제는 수행자들이 사치와 향락생활로 참선과 기도 등 본분에 소홀히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었다. 정도전의 지적처럼 출가수행자들이 큰집에서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생활을 일삼으니 마치 왕자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다. 때문에 절집에서 향락생활로 하루아침에 소비하는 재물이 백성 열 집의 재산이라고 했을 정도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정혜결사(定慧結社)나 원묘 료세(圓妙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가 불교계의 모순과 수행풍토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개혁불사가 지속되기에는 정치사회적 환경과 적지않은 불교계의 부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나중에 조선의 국가이념이 된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 유입되고 유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을 때는 불교계가 사회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비난을 넘어서 있었다. 예컨대 불교는 정치에도 해악이 될뿐더러 인륜(人倫)을 부정하고 허망한 설로 속이는 이단(異端)이므로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부정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광명사를 찾은 공민왕의 근심 역시 이와 같은 불교계의 상황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민왕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해소했던 환암 혼수가 한국불교에서 지닌 가치는 또 있다. 조선 영조 연간에 채영(采永)찬술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는 환암을 태고 보우의 법을 이은 1대 제자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지난 후에 발발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결과였다. 오랜 탄압과 수탈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뿐 교단과 선교학(禪敎學)의 체계적인 계승이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의 체계를 세우는 일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불교의 중흥조인 청허 휴정과 그의 제자들은 태고 보우(太古 普愚)를 해동선불교의 초조로 삼고 환암 혼수를 전법(傳法)제자로 올렸다. 그러나 나옹 혜근(懶翁 惠勤) 역시 환암 혼수의 스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환암 혼수와 나옹의 인연은 두 사람이 여러 차례 서로 만나 도(道)의 요체에 대해 물었고, 나옹은 이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 산형(山形)의 주장자 등을 대사에게 신표로 주기도 했었다. 나옹 혜근과 태고 보우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선진적인 선법(禪法)으로 수행하고 한 소식을 일깨운 인물들이다. 때문에 한국 선불교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이 법맥문제는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수수께끼와도 같다. 세간의 일은 진실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여하튼 환암 혼수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정착으로 선불교가 이 땅에 알려진 이후 조사선의 가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고려 말 선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삽화=강병호 화백
삽화=강병호 화백

 

지웅존자(智雄尊者) 환암 혼수는 휘가 혼수(混修)이고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성은 조(趙)씨로서 아버지가 현감으로 있던 부임지인 오늘날 지명으로 경북 예천 용주에서 1320년 3월 13일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숙령(叔鴒)으로 사헌부 소속 정6품의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경(慶)씨로서 사대부 가문이었다. 그는 어려서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를 많이 하였다. 집안에서 출가하면 연명할 수 있고, 큰 인물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12세 이후 계송(繼松)스님을 따라 상좌가 되었다. 이후 22세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31세에는 어머니의 병환소식을 듣고 가까운 경북 성주(星州)에서 5~6년을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환암은 법화경으로 명복을 빌고 나서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식영 연감(息影 淵鑑) 스님을 만나 능엄경의 25가지 방편수행을 수학하여 그 진수를 얻었다.

능엄경楞嚴經은 밀교사상과 선종의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이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타의 제자인 아난다(阿難陀)가 마등가 여인의 주술에 의해 마귀도에 떨어지려는 것을 부처의 신통력으로 구해낸다. 그리고 나서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의 공덕력을 찬양하고, 이 다라니에 의해 모든 마귀장을 물리치고 선정에 전념하여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얻어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후의 목적임을 밝혔다. 따라서 이 경은 밀교사상이 가미되기는 하였지만, 선정(禪定)이 역설되고 있기 때문에 밀교 쪽보다는 선가(禪家)에서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의 주석가들은 모두 선문의 비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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