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잎’과 연결해 깨달음 표현
의단은 개념으로 풀이 안 돼
상징과 비유 돋보이는 오도시

-오조법연의 오도송

산자락 한 마지기 노는 밭이여

두 손을 모으고 어르신께 묻나이다.

몇 번이나 되팔았다 다시 사곤 했는지요

솔바람 댓잎 소리 못내 그리워.

山前一片閑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憐松竹引淸風

임제종 문하 양기파의 3대 법손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의 오도송이다. 그의 깨달음 은 '댓잎'에 연결돼 주목되고 있다. 여기에서 '노는 밭[閑田]'은 우리의 본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온갖 현상과 환상에 취해 본성을 저버리기 일쑤다. 현상과 환상에 취하면 분별심이 일게 마련이다. 분별심이야말로 깨달음의 큰 장애다. 그래서 3조 승찬대사가 『신심명』을 통해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고 조주화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신심명』을 거론하며 분별심을 경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옛조사들은 후학들에게 망상과 분별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범부들의 일상은 그렇지 않다. '몇 번이나 되팔았다 사곤'하는 행위가 우리 범부들의 일상 행위다. 법연 역시 의단(疑斷)을 해결하는데 있어 그것이 언어나 개념으로 풀거나 파악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이 시를 통해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단 법연은 의문 속에 머물러 결국 오입(悟入)하는 선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런 그에게 선과 삶은 둘이 아니다. 선과 삶은 상즉(相卽)하는 것이라고 그는 후학들에게 강조한다. 이 시는 그런 법연의 삶이 과장되거나 꾸밈이 없는 상태로 전달되고 있다. 또한 한시로서의 운문과 대구(對句)도 그 격이 맞아 떨어져 수준 높은 시적 가치를 갖고 있다. ‘지’와 ‘매’, ‘옹’과 ‘풍’의 시어 선택이 그것이다. 그래서 선자들에게 일급의 오도시로 받아들여졌다. '솔바람 댓잎 소리'는 바로 우리 일상의 생활이지만 늘 우리가 그리워하고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본성이자 본성을 바로 깨쳐 아는 깨달음의 세계다. 향엄이 돌이 대에 부딪는 소리로 깨달음을 선언했듯 법연은 솔바람이 댓잎을 건드리는 것으로 오입의 경지를 설파하고 있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이처럼 중국선사들의 오도송은 상징과 비유에 있어서 서로가 엇비슷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한국선사들의 오도송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깨달음엔 A와 B가 없기 때문일 터이다. 다시 말해 내용이 비슷하다고 해서 모조 또는 복사를 통한 깨달음은 있을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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