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론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지적 갈애 해소 못하던 중
마조와의 법거량 통해
한 순간에 깨달음 얻어
심경을 표현한 게 이 오도시

-양좌주의 오도송

선시로서의 백미로도 꼽히는 당대(唐代)의 양좌주(亮座主)의 오도송은 기존 선사들과 다른 특별한 분위기와 맛을 안겨준다. 양좌주는 팔만장경을 두루 섭렵하여 경전강의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좌주는 강사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삼십년이나 아귀로 지내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사람의 몸 되찾았도다

청산에는 스스로 구름의 짝 있나니

동자여, 이로부턴 다른 사람 섬기라.

三十年來作餓鬼 如今始得復人身

靑山自有孤雲伴 童子從他事別人

양좌주가 그의 스승 마조도일 선사를 친견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 오도송으로 그의 제자들을 해산시킨다. 그리곤 서산에 들어가 소식을 끊었다. 영운이 삼십년을 칼을 찾기 위해 헤맸던 순간이 양좌주에겐 아귀와 같은 시절이었다. 무엇이 양좌주의 아귀였던가. 진리를 구한다고 불경과 논서에 파묻혀 온 지난 날의 상황이다. 육십 권으로 된 『화엄경』과 그 논서들을 강의했던 위치의 양좌주로선 마조와의 법거량을 통해 한 찰라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만큼 경론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지만 지적 갈애는 해소하지 못했을 터이다. 무엇을 얻어도 부족함을 메울 수 없었고 그럴수록 더욱 지적 습득에 욕망을 불태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는 그것을 '아귀'로 비유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스승 마조대사를 만나게 된 것은 획기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마조를 만나 깨침의 깊이를 구하고 난 후 그의 행적에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본래면목을 찾은 그는 오도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해법이 바로 이 오도시에서 표현되고 있다.

뒷구절에 나오는 '청산에는 스스로 구름의 짝 있나니'가 깨달음을 전하는 바로 그것이다. 산을 체(體)라 하면 구름은 용(用)이다. 산을 평등의 이(理)로 본다면 구름은 차별의 사(事)다. 이렇게 체와 용이 둘 아님을 본 양좌주의 깨달음은 제자들을 해산시키면서 대단원의 절정을 동반한다. 즉 남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청산하고 각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간곡한 충고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 섬기라'는 바로 각자의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시 표현의 역설에 해당한다.

한편의 마음을 전하는데 이렇듯 기승전결의 시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작품은 흔치 않다. 이 오도시가 갖고 있는 매력이다.

이처럼 중국의 선사들은 깨침의 순간을 맞는데 있어서 '복사꽃' '구름' '청산' 등 자연물과 합일된다. 마치 조주선사가 '뜰앞의 잣나무'로 심법(心法)을 전하는 이치와 같다.

-불교언론인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