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삶과 너무 닮은 시인의 삶
숨은 꽃처럼 살자던 삶
이해관계 없는 만남으로
순수하고 아름답게 이어져
혼란스러울 때 더욱 생각 나

지난 1월 어느 도시 문화예술인신년하례회에서 한 대표이사가 환영사 대신 박용래의 시 「소리-新年頌」을 낭송하여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둥 둥둥 울려라 출범의

 

북소리 울려라/ 지잉 징 울려라 출범의 징소리 울려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한송이 꽃을 위해 정의를/ 한마리 양을 위해 자유를/ 평화 위해, 영원 위해/ 밟아도 밟아도 소생하는 민들레의 의지로/ 휘여도 휘여도 꺾이쟎는 버들개지의 의지로/ 오, 그대/ 일월의 연자매!/ 유구한 인고의 산하여/ 인고의 의지로/ 이끼 낀 바위에 돌꽃이 피듯이/ 오뉴월 하늘에 서릿발 내리듯이/ 저, 관촉사 문살의 연화무늬 듯이/ 그윽히 아름다운 아름다운 슬기로/ 둥 둥둥 울려라 출범의 북소리 울려라/ 지잉 징 울려라 출범의 징소리 울려라”라고 하여 절정을 이룬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문화예술인들에게 하고 싶은 내용,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한 시인의 소망이 이 시 한 편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박용래 시인이 작고한지 4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의 시가 많은 이들에게 가슴 깊이 울림을 주고 있다.

‘눈물의 시인’, ‘정한의 시인’ 등으로 일컬어지는 박용래(1925~1980)는 ‘시’로 귀결되는 삶을 살다간 시인이다. 그는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가난을 추구했으며, 시인의 길, 시의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와 절친했던 이문구는 「박용래 약전」(박용래 시전집)에서 “군자는 비록 세월이 다르되 길이 같고, 소인과 소인은 세상이 달라도 역시 한 무리일 뿐”이라고 하며 박용래를 군자다운 시인의 길을 걸은, 아름다운 이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더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詩篇)의 행간에 마련해 두고 살았다. (……)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情恨)의 시인이여.”라고 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의 대표시 「저녁눈」은 그의 소박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라고 한 이 시는 늦은 저녁에 눈이 오는 풍경을 관조하듯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아파트가 생겨 사라진 대전 오류동의 말집을 배경으로 눈이 ‘붐비는’ 모습을 은은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표현하였다.

그는 ‘시인’이라는 점에 많은 자부심을 느꼈지만, 결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시로서 자신을 드러냈고, 시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지만, 단 하나 너희들이 시인의 딸이라는 것만은 남길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럽구나”(박연, 「아버지는 오십 먹은 소년」)라고 자녀들에게 말하곤 하였다. 경제적으로 무능했어도 ‘시인’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컸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자녀들에게 ‘숨은 꽃처럼 살아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아버지, 다시 가을입니다. 그날 국화 한 송이의 별리 이후, 매캐한 香어내음 이후, 生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 어느 들, 숨은 꽃으로 살라하셨지요.”(박진아, 「숨은 꽃」)라고 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여느 시인들과는 달리 숨은 꽃처럼 살고자 했으며, 시인의 길, 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던 것이다.

그의 집 ‘청시사(靑柿舍)’에는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서정주, 박재삼, 박목월, 고은, 이근배, 임강빈, 조남익, 조재훈, 나태주, 홍희표, 강태근, 김성동 등 문인들뿐만 아니라 최종태, 이종수 등 예술가들도 그를 찾았다.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한 만남이었다. 순수한 문학적 만남, 예술적 만남은 자연스럽게 박용래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서정주는 “大韓民國에서/ 그 중 지혜있는 장 속의 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朴龍來인가 하노라”(「朴龍來」)라고 노래하였고, 임강빈은 “당신은 떠나서/ 쓸쓸한 뜨락을/ 한 줄의 시로 지키고 있습니다.”(「쓸쓸한 뜨락을 가득 채우는」)라고 추도하기도 했다. 또한 이근배는 “삭정이 진 슬픔/ 한줄 시 고독을 심던 새는/ 지금은 날아가고 없다”라고 하여 박용래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했으며, 홍희표는 “수수이삭 사이로 접시 들고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집 호롱불/ 단추구멍 속으로 가랑잎 들고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섧은 盞”(「섦은 잔(盞)」)이라며 술을 좋아했던, 박용래의 ‘섧은 잔’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풀꽃」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나태주는 “들리지도 않는 부뚜막의 겨울 귀뚜라미 소리/ 찔찔찔찔 들린다 해서 잠들지 못하는/ 초로의 시인.”(「박용래 – 오류동」)이라고 하여 박용래를 노래했고, 김종해는 “하늘에는 별, 땅에는 詩人/ 이승을 밝히던 그의 항해등도 울음소리도/ 물결 속에 흔적없이 가라앉았다.”(「항해일지 2 - 朴龍來 가다」)라고 하여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비둘기, 독수리/ 같은/ 새 한 마리/ 안고/ 외길/ 가는/ 崔鍾泰의 벙거지/ 말잠자리, 왕잠자리/ 따르고/ 丹環빚는/ 손끝에/ 타는 듯/ 봉선화 ……”(「손끝에」)라는 시를 박용래에게 받은 최종태는 “나는 맑고 깨끗한 사람을 좋아한다. 시인 박용래가 그런 사람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가 자꾸만 생각이 난다. 아마도 내가 무척이나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라고 시인 박용래 표지에 쓰기도 했다. 언론인이자 영화인인 호현찬은 “혼탁한 세상이 더 할수록 그와 같이 고고하고 정갈하게 살다 간 한 시인에 대한 생각이 솟아오른다.”(「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인생 - 「자화상」 1·2」)라고 그를 회상하였다. 그리고 이채강 시인은 “시 이외의 어떤 세속의 너울을 쓰지 않았으며, 오직 천부적인 문학의 밭에서만 살다 간 순수한 생명의 풀꽃”(「박용래 시인의 장례식」, 문학사상, 1980)이라고 박용래 시인의 장례식 풍경을 스케치하며 술회한 바 있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를 그리워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숨은 꽃’처럼 살다간 삶, 시에 대한 격정적인 삶, 시 외에 다른 것에 눈길을 두지 않은 삶 때문이리라. 그가 작고한 지 40년이 되는 ‘지금 여기’에서도 그를 계속 호명하고, 그의 시를 찾는 것은 여전히 그의 시적인 삶, 시의 길을 살다간 그가 귀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박용래의 숨은 꽃과 같은 삶은 보이지 않는,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불교적 삶과도 많이 닮아 있다. 숨은 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며 다가가는 불교적 포교방식과도 많이 맞닿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등 불안하고 혼란한 상황에서, 종교의 역할이 더 없이 중요한 이 때에 보이지 않는 배려가 숨어있는 박용래의 숨은 꽃과 같은 삶을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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