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계기로
편백운은 공업이 무서운 이유 알길

선인선과(善因善果 위한
마지막 공업 지어주길 바라

업(業)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이다.

승한(본지 주필)
승한(본지 주필)

 

공업은 ‘저마다 공동으로 선악의 업을 짓고 공동으로 고락(苦樂)의 인과응보를 받는 일’을 말한다.

별업은 ‘중생이 각기 다른 과보를 받게 되는 개별적인 업’을 말한다.

2003년, 8백11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 2015년, 8백여 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간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는 물론, 지난 12일 현재 1천1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죽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공업 가운데서도 ‘공업’에 속한다.

그럼, 불교에서는 공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불교에‘공업’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구사론(俱舍論)』이다.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를 집대성한 『구사론』은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이라 칭하고, 사회 집단적인 행위, 예를 들면 국가 간의 전쟁이나 이민자 집단 차별, 외국인 노동자 혹사 또는 인종 차별 행위 따위를 대표적인 공업이라 여겼다.

공업은 대개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태어날 때 같이 말려들기 쉽다. 크겐 1⦁2차 세계대전이 그렇고, 작겐 우리 동족이 겪은 6⦁25전쟁이 그렇다.

또한 장마철에 강에 흙탕물이 떠내려가고, 온갖 쓰레기와 폐기물이 떠내려가는 것은 어느 개인이 혼자서 저지를 잘못이 아니라, 한 사회가 저지른 공동의 책임, 곧 공업인 것이다.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변형이라는 점에서 사스나 메르스나 이번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의, 인류에 의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류 최고의 ‘공업’이다.

공업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도 나온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쓰게 된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바로 삼천대천세계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한 노승은 설파했다.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다는 것”이라고.

공업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별업은 대부분 혼자 짓고, 혼자만의 업으로 끝난다. 자업자득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자기가 저지른 과보를 자기가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공업은 다르다. 업은 자가 혼자 지었지만, 그 과보는 고스란히 동시대의 한 나라, 한 지역, 한 나라, 한 집단, 한 단체, 한 집안에서 중생들이 그대로 함께 물려받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중세 페스트나 작금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인류 대재앙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도 얼마든지 작동된다.

히틀러로 상징되는 나치가 그렇고, 일본 전범이 그렇고, 1980년대의 전두환이 그렇고, 좁게는 작금의 우리 종단 현실을 2년 만에 암울하게 망가뜨린 편백운이 그런 공업 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건, 그런 공업 분자들일수록 자신들이 그런 공업 분자들임을 임을 모르고 자신의 공업을 더 감추려 하거나, 그 공업을 더 키우려하다가 더 큰 공업을 짓고 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중국에서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처음 경고하고 나선 이원량 의사를 숨기려했다가 끝내 숨지게 하고 만 중국당국의 처사가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더 키운 공업이다.

우리 태고종도 이제 더 이상 공업에 빠져선 안 된다. 아니, 공업을 방치해둬선 안 된다. 도려낼 공업은 과감하게 도려내고, 만들어넣은 공업은 과감하게 새로 만들어 넣어야 한다. 느리되, 빠른 속도가 필요하다. 전염병 퇴치엔 신중하고 엄밀한 태도도 필요하지만, 속도전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행이 공업의 특징 중엔 좋은 면도 있다. 내가 저지른 일이 점차 파장을 일으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대난망한 일지만, 편백운에게 종도들을 위한 일말의 양심과 염치와 애종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종도들 앞에 진정으로 참회하고, 선인선과(善因善果)를 위한 마지막 공업을 지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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