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세계인구는 30억을 기록했다. 석유 에너지 소비가 더욱 왕성해지며 엔진을 만드는 기술(트랙터나 항공이용 농법)이 발달함에 따라 식량생산은 다시 한 번 치솟았다, 그리고 그만큼 세

계인구도 증가했다, 덕분에 세계인구가 40억으로 늘어나는 기간은 1960년에서 1974년까지 불과 14년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 13년 만에 10억이 더 증가, 1987년엔 세계인구가 50억이 되었다. 1995년 57억, 현재는 79억에 이르렀다. 현재의 인구증가율 추세라면, 2030년에는 100억, 2070년엔 200억, 2150년엔 800억을 넘어선다. 허나 이 증가율이 계속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이만한 인구가 먹고 살 만큼의 식량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구가 계속 증가함에 식량 부족뿐만 아니라 에너지 고갈, 수질이나 공기 오염의 문제도 심각한 위험사태로 치달을 것이다. 벌써부터 종의 개체수가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해를 더할수록 미세먼지로 가득 찬 어둑한 하늘이 늘어가고 있다. 근해는 물론 원양에서 잡은 물고기들의 살 속에서 미세 플라스틱이나 인체에 해로운 중금속이 상당 함유돼있다는 소식도 이젠 낯설지가 않다.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인구 과밀 현상은 더 많은 공해를 낳는 주요 원인이다.

1970년대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로마클럽>인가에서 장차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식량 부족, 에너지의 고갈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는 보고를 한 바 있다. 그 여파가 컸던 탓인가. 그 시절 우리나라에선 정관수술이 적극 권장됐다. 중국에선 아이 하나 낳기 운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후 어느 나라에서 인구 문제를 정책적으로 신중하게 시행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국가 간 산업경쟁에 휘말리느라 아니면 이런 ‘거대 담론’에 면역이 생긴 탓에 모두들 둔감해진 모양이다. 인구 과밀로 야기된 심각한 환경·경제·보건의 문제들은 단지 그 사회의 골칫거리 정도로만 취급되어져왔다.

인구 과밀은 빈곤, 물 부족과 굶주림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가뭄이 잦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선 식수를 구하려면 수 킬로미터를 다녀야한다. 그나마 손수 힘들게 땅을 파낸 깊은 웅덩이에 고인 더러운 흙탕물로 갈증을 달래는 형편이다. 필리핀이나 네팔에선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으려 쓰레기를 뒤지곤 한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이다.

잘 사는 나라에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어린이의 경우, 1970년대 이후 (농약 사용량이 급격이 늘어나면서) 소아암이 급격히 증가했다. 소아암의 주범은 새로운 독극물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분유에 함유된 미세 독극물로 인한 체내 축적이 큰 문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갑상선암, 폐암, 유방암 등 각종 암 환자가 전 세대에 비해 부쩍 늘어났다.

현대의 전쟁도 종종 인구 과밀에 따른 경작지 부족, 석유 혹은 광물 같은 자원 때문에 일어난다는 분석이다. 세계 곳곳에서 급속한 인구·경제 성장률이 그 나라를 뒤틀어서 사회 지배층(기업이나 정부나 군부 엘리트)에게는 권력과 재화를 극단으로 집중해주는 반면, 일반인과 그 가정은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사실 빈부격차가 날로 더 악화되는 현상은 나라 체제가 어떤 정치·경제 체제를 표방하든 별 상관이 없다.

인구 과밀의 세상은 많은 인구의 빠른 이동 속도 때문에, 전염병의 창궐 가능성을 높게 한다. 1918년 전 세계 2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독감이 그랬다. 이제 조류 독감은 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에게로 빠르게 전염이 확산되고 있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인 메르스나 사스 그리고 이번에 발생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속수무책으로 급속하게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통신과 운행 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의 작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웃나라의 문제가 곧 우리에게 닥칠 문제로 실감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가까운 중국의 공해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직접적인 폐해로 다가오지 않던가.

중동에서의 혼란은 에너지 공급의 불안을 야기해 우리 삶에 직격탄을 쏜다. 인구·식량·자원 문제는 한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나라 간에 이런 ‘거대 주제’에 대해 주요 정보·지식을 솔직하게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가난한 나라에선 빈곤과 심각한 환경 문제에 대해 아예 입을 다물기도 한다. 중국의 심각한 대기 오염 문제는 국제 사회에서 별다른 이슈로 취급되지 못하도록 중국 정부가 ‘억제’를 하기도 한다. 세계의 현실 문제를 다루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사실 중심 세계 연감』목록에는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굶주림이나 기근 같은 중요 항복들이 빠져있다. 영화배우들이나 국회의원들, 운동선수들이라면 시시콜콜할 정도로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면서.

과문한 탓이지만 나는 여태 미래 세대의 삶의 질에 대해 깊이 언급을 한 종교계나 언론매체를 접해보질 못했다. 티브이 방송도 결국 하나의 (광고)사업인 까닭에 시청자에게 근심을 주는 무거운 주제는 피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머잖아 이제까지 전개해온 우리의 ‘문명적 패턴’의 습관적 삶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올 것만 같다. 톰 하트만은 말한다. 근본적인 대책은 고대의 지혜에서 찾아야 한다고. 과잉 소유/지배 의식이 우리를 ‘문명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지적도 한다.

이제까지의 ‘문명적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장차 우린 공멸을 맞을 밖에 없다. 진즉에 세상/집단 에고를 바꾸게 하는 집단적 의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사회적 위치성을 기대도 해본다. 국제적으론 환경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각성과 협력 그리고 유엔 주도하의 전 지구적 산아제한 운동이 전개되기를...

-시인 · 정신건강의학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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