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싸나 명상은 붓다에 의해서 가르쳐진 고대 수행법

불교의 명상을 실제로 행하고 있는 관점에서 본다면, 남방 상좌부권과 대승권의 선불교 권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남방 상좌부 권의 대표적인 나라가 버마 태국 스리랑카 등지이다. 이들 나라에서 수련한 일부 비구나 재가 명상가들이 자기 나라 이를 테면, 유럽이나 미주 호주(뉴질랜드) 등지에 가서 명상센터를 개원해서 명상수련을 하고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남방상좌부권은 버마가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인 것 같다. 버마 정부나 국민들은 불교가 생활화되어 있고, 신앙심이 깊다. 많은 불자들 또한 명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명상이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출가한 비구스님들보다는 오히려 재가불자들이 명상에 더 열을 올리고 실제로 많은 수의 재가불자들이 명상센터에 가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주로 위빠싸나(윗파싸나)를 닦고 있는데, 본인의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적은 비용으로 명상센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너무나 좋은 것 같다. 양곤을 비롯해서 시골 등지에 쾌적하고 시설이 좋은 명상센터가 제법 많이 있어서, 버마 불자들만이 아닌 세계 각국에서 많이 몰려들고 있다.

 

버마의 불자들이 명상수련을 하고 있다.
버마의 불자들이 명상수련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서양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아시아권에서 온 불자들로 만원을 이룬다. 동남아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홍콩 중국 한국 일본 등지의 아시아 권 불자들이 와서 열심히 명상수련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항공편을 이용해서 와야 하지만, 명상수련센터에는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철저한 대중공동체 프로그램에 의해서 일상이 전개되고, 위빠싸나 명상을 하면서 수시로 명상 스승의 점검을 받으면서 명상과정의 진행을 점검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상당수의 불자들이 버마를 찾아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스님들도 많고 남방 상좌부 비구로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분들도 꽤나 되는 것 같다. 좋다 나쁘다 하는 이분법적 평가에 앞서서, 아무튼 불교의 명상수련을 버마에서 까지 가서 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방점을 두고 싶다. 뭔가 자신을 살펴보고 정신세계에 대한 경험을 해 보고 싶은 구도적 욕망 그 자체를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부처님께서 교시하신 수행법에 의해서 수행을 한다는 그 자체는 인정해야 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권장해야할 좋은 일이라고 본다.

버마의 명상수련, 특히 한국 불자나 스님들이 거기까지 가서 명상 수련을 한다는 그 행위는 우리의 명상풍토를 먼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먼저 거론하고 싶다. 왜 우리는 불자들이 절에 선방에 와서 명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가이다. 아주 적은 비용으로 명상수련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우리의 불교도 한층 세계화의 대열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고 생각한다.

태국에도 명상센터가 있지만, 버마보다는 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으며, 스리랑카도 마찬가지이다. 단연 버마가 한국불자들에게도 명상수련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좋다고 권장하고 싶다.

일본에도 선불교 즉 젠 센터가 있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접근하기도 그렇게 용이하지가 않다. 오히려 유럽이나 미주 등지의 젠 센터에서 선을 닦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명상수련과 요가 수련을 위한 안내 포즈를 취한 서양의 한 여성 명상 스승.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명상수련과 요가 수련을 위한 안내 포즈를 취한 서양의 한 여성 명상 스승.

먼저 남방상좌부권에서 주로 닦는 위빠싸나(Vipassanā)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자. 빨리어로는 위빠싸나라고 하며, 산스끄리뜨어로는 위빠쌰나(vipaśyanā)라고 하는데 발음만 약간 차이날 뿐, 뜻은 100% 똑 같다.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한역했다. 영어식으로 역하면 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reality가 된다. “실제의 참된 본질을 통찰 한다”는 정도의 뜻이 되겠지만, Vipassanā에 대한 뜻의 풀이가 적확(的確)하게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론적으로는 뜻을 이해하겠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명상이라는 수행을 통해서 이런 경지를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다. 뜻을 이해하는 것과 본질적인 진리를 터득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엄청난 간격이 있다. 중국에서는 한자로 ‘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야(視也) 즉 ‘본다’는 정도의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영어식 표현이 더 구체적이면서 뜻이 명확하게 전달된다고 할 것이며, 한자식 표현은 상당한 한자 실력에 의한 함축적인 의미를 간파하는 능력이 있어야 의미 전달이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한국어로도 한자적 의미 이상의 다른 뜻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통찰의 관점에서, ‘마음 챙김’ ‘알아차림’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필자는 ‘알아차림’이 더 적합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무엇을 통찰한다는 것인가? ‘실제의 참된 본질’을 통찰한다고 한다. ‘실제의 참된 본질’을 세 가지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한역에서 삼법인(三法印)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한역 식으로 우선 풀이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하나하나 풀어보자.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존재에 대한 무상(impermanence)은 ‘permanence’의 반대어이다. ‘permanence’의 뜻은 ‘staying the same or ​continuing for a ​long ​time’이다. 반대어이니까 ‘같은 상태나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는다는’ 소박한 뜻을 갖고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suffering or unsatisfactoriness’이라고 했다. ‘suffering’은 ‘physical or ​mental ​pain that a ​person or ​animal is ​feeling’ 인데, 한 인간이나 한 동물이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라고 했다. ‘unsatisfactoriness’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suffering’이 더 적합한 뜻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realisation of non-self’는 ‘non-self’의 인지 즉 깨달음이다. ‘non-self’가 무아(無我)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라는 어떤 실체적 존재가 없다는 뜻인데, 사람만이 아닌 존재일반을 가리킨다.

 

한 여성이 일상생활에 응용하여 기초 명상수련을 시도하고 있다.
한 여성이 일상생활에 응용하여 기초 명상수련을 시도하고 있다.

위빠싸나 명상은 붓다에 의해서 가르쳐진 고대 수행법이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서 버마나 태국 실론 등지의 상좌부권 스승들에 의해서 다시 소개되고 발전시킨 수행법이다. 특히 버마에서 위빠싸나 명상 수행법을 재발견하여 보급시킨 불교의 오래된 정통수행법이다.

마정 보검(磨汀 寶劍)<해동임제 선림원장>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