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부 종주국 실론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불교

동방불교대학 총장 원응 스님이 특강을 하고 있다.
동방불교대학 총장 원응 스님이 특강을 하고 있다.

시작하는 말

세계불교 3대 패밀리

1. 테라와다

2. 바즈라야나

3. 마하야나

태고종의 위상

맺는 말

 

 

세계불교 3대 패밀리

1. 테라와다

세계 3대 패밀리는 ‘테라와다, 마하야나, 바즈라야나’ 인데, 테라와다는 상좌부 불교를 말한다. 현재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가 주류 상좌부 불교권이다.,

태국

태국불교 승가는 미얀마 불교 승가와 함께 테라와다(상좌부)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나라이다. 필자는 80년대 초부터 태국불교승가에서 비구생활을 경험한 이래로, 지금까지 수십 차례 태국을 방문하여 승가를 지켜봤지만, 항상 변함없이 상좌부의 전통이 잘 계승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몇 년 전에 100세의 나이로 입적하신 썸뎃 프라 냐나상와라(1913-2013) 승왕이 나의 스승이시다. 그는 태국의 제19대 승왕을 역임하시고 몇 년 전에 입적하셨다.

태국불교에서는 승왕을 상카랏(Sangkharat)이라고 부르는데, 영어식 표현은 The Supreme Patriarch of Thailand 인데, 태국 승가의 최고 수장이란 의미이다. 썸뎃 프라 상카랏 사콘라마하상카빠리나욕(Somdet Phra Sangkharat Sakonlamahasangkhaparinayok; the Supreme Patriarch, the Head of all Members of the Sangha)이 공식 호칭이다. 나는 항상 그를 존경하는 뜻에서 상가라자(승왕)로 호칭한다. 미얀마나 스리랑카 캄보디아와 라오스 승가에도 상가라자 제도가 있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태국 승가의 상가라자의 권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태국 승왕은 개인의 인품이나 역량도 뛰어나지만, 태국 국가에서 태국 승가는 말할 것도 없고 왕이나 일반 국민에 이르기 까지 그에 대한 존경심과 대우는 거의 부처님과 같은 수준이다. 그는 태국승가회 최고회의에서 선출되어서 1989년 부미볼 국왕에 의해서 임명되었다. 25년간 승왕의 지위에 계시면서 태국승가를 이끄셨다.

실론(스리랑카)

실론에 갔을 때, 운 좋게 와지라라마 사원에서 비구 보디(불교학승)스님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한수 배웠는데, 그는 스님으로부터 섬 암자 불교학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이 섬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80년대 초여서 주력 비구들은 안계시고, 스리랑카 출신 제자 비구가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이 무렵 냐나포니카 대장로 스님은 캔디의 숲 속 암자로 옮겨간 이후였고, 비구 보디스님은 그의 후계수업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냐나티로카 조실의 대를 이어서 제 2대 조실로 활동하셨던 냐나포니카 비구는 유태계 독일인으로서 22세 때,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옮겨서 생활할 때, 독일의 불교도들과 만나게 되고 불교를 접하게 되는데, 섬 암자에서 불교학파를 주도하고 계시던 냐나티로카 대장로 비구의 저작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냐나티로카 비구는 섬에 암자를 세우고 유럽의 비구들과 수행을 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그는 이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몇 차례 편지를 냐나티로카 비구에게 보내서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을 봉양해야할 입장이어서 당장 섬으로 갈 수 없었으나, 부친이 사망하자, 1936년 실론으로 향했고, 드디어 섬 암자에 도달해서 비구계를 받고 불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그는 그의 어머니와 일부 친척들을 실론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런 결과로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면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약 6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사건이 홀로코스트다.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3분의 2가 죽임을 당했다.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 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유럽의 많은 유태인들은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가 너무나 크다. 이들 중에는 유대교의 신을 믿지 않는다. 왜 유대교의 신은 이런 악의 상황을 그냥 지켜봤느냐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유대교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유럽의 많은 유태인들이 불교에 심취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비구들도 제법 되고, 이곳저곳에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오너들도 제법 된다. 지금 말하는 냐나포니카 비구나 비구 보디 등이 다 유태계이다.

냐나포니카 비구는 섬 암자에서 수행을 한지 얼마가지 않아서 냐나티로카 장로와 함께 독일 국적이라는 이유로 1939년부터 브리티시에 의해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는데, 수용소에서 그는 《숫따 니빠따(the Sutta Nipata 經集)》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아미담마삐따카(Abhidhamma Pitaka 論藏)》의 첫째권인《담마상가니 (Dhammasangani 法集论》를 번역하고 《싸띠빠따나 명상(Satipatthana Meditation 사념처》을 완성한다.

인도 북부의 데라 둔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비(非) 브리티시 비구들은 1946년 2차 대전이 끝나자 석방되어 실론의 섬 암자로 귀환하게 되는데, 그의 스승인 냐나티로카 대장로에게 어떤 신심 깊은 불자가 캔디 근처에 있는 숲 지역을 보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에게 제 2라운드인 숲 속 암자 시대가 전개된다. 이들 비구들에게도 나이가 들어가자 덥고 숨 막히는 섬의 기후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캔디의 숲 속 암자는 시원한 지역이다.

1952년 냐나티로카 대장로와 냐나포니카 장로는 버마 정부로부터 1954년에 개최하게 될 제 6차 경전결집회의( the Sixth Buddhist Council)에 참가하도록 초청을 받는다. 냐나티로카 대장로와 냐나포니카 장로는 1954년 제 6차 경전결집대회 개회식에 참가하여 냐나티로카 대장로는 축하 메시지를 낭독하였다. 냐나티로카 대장로는 이후 실론으로 귀환하고, 냐나포니카 장로는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장로 문하에서 명상 수업을 받고 1956년 제 6차 경전결집대회 폐회식에서 냐나티로카 대장로의 축하 메시지를 대독하게 된다. 냐나포니카 장로는 명상 경험을 하고 난 다음, 그의 마스터 피스인《불교명상의 핵심》을 저술하게 될 동기가 부여된다.

미얀마

미얀마 불교는 태국 불교와 더불어서 남방 상좌부의 양대 산맥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부처님 승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 불교가 미얀마 불교와 태국 불교이다. 어쩌면 미얀마 불교가 더 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얀마 불교는 실론에서 불교가 집중적으로 전해졌는데, 버마(미얀마)에 전해질 때의 실론 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던 상좌부의 종가집이였다. 1861년 비구 빠나사미(Paññāsāmi)에 의해서 저작된 버마 불교역사를 말해주는 사사나 왕사(Sāsana Vaṃsa 승단사僧團史))나 실론에서 저술된 왕통사(王統史)인 마하왕서(Mahavamsa)에 따르면, 기원전 228년 아소카 대왕은 불교 전도단(傳道團)을 파견할 때, 비구 소나(Sona)와 우따라(Uttara) 두 장로를 미얀마의 옛 이름인 수바나부미(Suvarnabhumi)에 다른 비구들과 경전들을 함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도의 안드라 익사바쿠 비문에 의하면, 기원후 3세기경, 한 티베트-버마 왕이 불교로 개종했다는 기록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문헌에서도 이 나라 사람들은 부처를 숭배하고 많은 사마나(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상당한 이른 시기부터 불교가 존재했었던 것 같다. 기원후 7세기 경,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비문에 따르면, 퓨(Pyu)와 몬(Mon) 지역인 버마의 중부와 하 버마 지역에 불교가 존재한 것으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은, 11세기에서 13세기 빠간(Pagan)의 왕과 왕비들이 탑과 사원을 많이 건립했다는 사실이다.

11세기 이전에는 인도의 보살불교도 한 때 유입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상좌부 불교가 버마 땅에 확실하게 심어진 것은 11세기 빠간(바간이라고도 함) 아나와라하따(Anawrahta 1014-1077)왕 때부터이다. 아나와라하따 왕은 1057년 군대를 하 버마 따톤의 몬 지역에 보내서 빨리어 대장경을 소유하기 위해서 정복을 하도록 했다. 왕은 몬 출신의 비구 쉰 아라한에 의해서 상좌부로 개종하게 되었고, 39권의 빨리어 경전을 입수했고, 빠간을 중심으로 한 버마 전역에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무렵 아리 불교(Ari Buddhism)란 전통이 있었다. 아나와라하따 왕에 의해서 상좌부 불교가 본격적으로 뜨기 전에 이 아리 불교 전통이 7세기부터 있어왔다. 인도나 티베트에서 무역 상인을 통해서 소개된 것으로서 밀교 계통의 불교였고, 용(龍) 신앙과 힌두교 등이 혼재한 불교였다. 어떤 학자들은 중국 남부 운남성 지역에서 유입된 불교 전통에 기원을 두기도 하는데, 이 아리 불교 전통의 승려들은 남방 상좌부의 승원 중심의 계율을 철저히 준수하는 승가(僧伽)가 아닌 숲 속에서 주로 살면서 술도 마시고 여자도 취하면서 오후에 음식도 먹는 그런 승려들이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빠간 왕실에서는 이런 식의 종교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또 이 무렵 태국 서남부지방에 가까운 하 버마에는 몬 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 몬 지역에는 일찍이 인도 남부와 실론과 인도네시아 등지의 상좌부의 영향을 받아서 상좌부 불교가 상당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캄보디아

캄보디아 불교는 현재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ism) 국가이다. 테라와다 불교는 빨리어 경전인 삼장(Tipitaka 三藏=경율론經律論)에 의거한다. 불교전적(佛敎典籍)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중부인도 아리안들이 사용하던 인도 유럽어계통의 프라크리트어(Prakrit) 가운데 한 언어로서 문자가 없는 구어(口語)이다. 프라크리트어는 마가다를 비롯한 갠지스 평원에서 사용되던 여러 지방 방언을 이렇게 부르는데, 빨리어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언어로 알려지고 있으나 일부의 학자들은 인도 서부 지역의 언어일수도 있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지만, 빨리어는 대체로 마가다 지방에서 사용되던 프라크리트어 가운데 한 언어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통설(通說)이다. 지금 이 언어는 인도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었지만, 테라와다(상좌부)의 경율론 삼장이 빨리어로 결집(結集)되어 있어서, 상좌부 국가들에서는 일상 회화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경전어(經典語)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이 언어를 모르면 경전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언어가 되어 있다.

라오스

동남아시아에서 라오스의 존재는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감이 매우 약한 내륙 국가이다. 라오스는 지리적으로 사방이 갇혀 있는 국가로서 답답함을 느끼게 하고, 해양이 없는 이유로 매우 폐쇄적인 나라처럼 여겨진다. 필자는 라오스를 세 번 정도 가봤다. 라오스는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사회주의 국가이다. 인구 7백만 명의 소국이다. 오늘날의 라오스 모습이 갖춰진 것은 14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이다. 라오스는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됐다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연합국가가 되었다. 제2차 대전 때, 일본군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1949년 다시 프랑스의 통치를 받다가 1954년에 이르러서야 입헌군주국인 라오스 왕국이 되었고, 바로 내전에 휩싸여 1975년 공산주의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라오스 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데올로기의 시험장과 같은 정치적 격변을 당하게 된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함께 공산주의 길을 걷게 되었고, 현재도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사회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 아래서도 불교란 종교가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이다. 라오스는 태국과 인접해 있고, 민족도 태국과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라오스에 들어온 것은 드바라와티(Dvaravati 6-13세기)의 시대에 8세기 몬(Mon) 승려들에 의해서이다. 몬족은 미얀마의 민족으로 현재는 대부분 下 버마의 몬 주, 바고 구, 이라와디 삼각주와 타이-미얀마 경계를 따라 살고 있지만, 한 때는 상당한 영역을 차지했던 민족이다. 몬족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초기부터 거주하던 민족의 하나로서 불교를 일찍이 받아들여서 미얀마와 타이에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였고, 몬 문화는 티베트 계통인 버마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부의 몬족은 일찍이 타이사회에 흡수되었고 서부의 미얀마의 몬족은 마찬가지로 동화의 압력에 직면해 있지만, 미얀마에서 몬족은 몬어(語)와 문화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상좌부가 뿌리 내리기전에는 밀교가 들어오기도 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크메르 통치자들이 루앙 프라방 지역을 통제했는데, 이 무렵에는 크메르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상좌부 불교를 대체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지배 계급이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에 한동안 대승불교가 석권했으나. 1353년 루앙 프라방에 파 눔(1316–1393) 왕이 등극하면서 크메르에서 상좌부 비구를 왕사로 맞이하면서 상좌부로 다시 전환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라오스 불교는 14세기에 널리 라오스 땅에 퍼진 것이다. 라오스의 왕들은 불교의 보호 왕으로서 역할을 했고, 이런 전통은 20세기까지 이어왔다. 라오스가 현재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지만,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걷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라오스 불교도 태국과 별다름 없이 남자라면 일생에 한번쯤은 삭발염의하고 비구로서의 경험을 쌓는다. 라오스 승가도 비구들의 교육은 사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라오스의 수도는 비엔티안이다. 근세에 이르러서 라오스 불교의 승가대학은 1929년 왕자 펫사랏 라타나봉사(Prince Phetsarath Ratanavongsa 1890-1959)와 상가라자였던 썸뎃 프라 로우케오 우텐 삭다(Somdet Phra Loukeo Uthen Sakda) 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현재 대통령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않는 곳에 새워진 불교대학에서는 교학, 율장과 빨리어 부처님의 일생, 북부 타이문자인 탐 문자(Tham script)와 라오스문자, 라오스와 크메르어와 수학 등이 주된 과목이었다. 종려나무 잎으로 된 경전을 사용했는데, 찬타나부리 사원에 도서관을 설립했고, 나중에 불교대학은 이 사원에 재 설립되었고, 1932년에는 루앙 프라방에도 분교가 세워졌다. 1950년에는 불교대학은 왓 싯타네 네우와로 옮겨지게 되었다.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