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명상은 관념적으로나 또는 추상성에 의한 막연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불교 고전 텍스트에 보존되어 있다.

앉아서 명상하는 부처님 상
앉아서 명상하는 부처님 상

그동안 명상에 대해서 소개해 왔다. 특히 인도에서의 명상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전회(명상의 역사-8)에서는 참선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했다. 참선과 명상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였다. 1시간 정도의 강의 자료였을 뿐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불교의 명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불교명상은 철저하게 불교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선불교에서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문자나 교학이 필요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적어도 궁극적인 깨달음의 진리는 문자나 어떤 경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을 통한 체득에 있음을 강조한 말이라고 필자는 이해하고 싶다.

불교의 명상은 관념적으로나 또는 추상성에 의한 막연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불교 고전 텍스트에 보존되어 있다. 불교고전 텍스트에 보존된 명상은 부처님과 직결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흐르면서 스승-제자와의 전법과정에서 내용과 다양한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직접 경험했던 깨달음과 열반으로 향하는 실천수행방법이 불교고전에 보존되어 있지만, 인도와 인도 밖의 공간과 시간이 흐르면서 스승과 제자사이의 전달과정과 방법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의 출가.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의 출가.

부처님은 왜 명상을 했으며, 무엇을 깨달았는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 는 인생이 고(苦)라는 것을 알고서 세속의 권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셨다. 출가해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서 붇다(覺者)가 되어 사람들은 그를 바가완(세존=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고 불렀다. 이 세상이 무상하고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명상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은둔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수행자들이 모여서 명상을 하는 곳과 스승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대에는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가하(왕사성)에 가야 이런 장소와 스승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마가다의 국왕은 빔비사라 왕이었고, 마가다는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카필라라고 하는 소국 출신의 왕자였지만, 빔비사라 왕은 이를 알아채시고 젊은 왕자출신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격려해줬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라자가하인 수도에 와서 정보를 들으니, 당대 가장 유명한 도인은 요가 수행자인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였다. 이 분은 요가명사의 대가였다. 그는 마가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바이샬리에서 인도정통 6파 철학의 하나인 샹카(sāṃkhya 數論)를 가르치고 있는 인도 고대 사상가였다. 그가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가르친 명상은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었는데, 한역에서는 공무변처(空無邊處, 無所有處)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무념무상에 의한 그야말로 더 이상의 번뇌 망상이 진공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느 기간 명상수행을 해서 스승의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스승은 말하길, 자기와의 동등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자신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치라고 했다.

하지만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딘지 만족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또 다른 도인으로 알려진 우다카 라마푸따(Uddaka Rāmaputta)를 찾아갔다. 그도 역시 인도고대 사상가로서 그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를 얻는 것을 최고 이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 경지까지도 마스터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딘지 자신이 추구하는 그리고 찾는 진리의 길과는 다른 것 같아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로 하고 보드가야의 전정각산이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6년 고행 끝에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 붇다가 되었다. 6년의 과정은 여기서 생략하고 바로 명상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명상 중에 마라의 악마들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으로 나뭇잎에 그려진 그림. 인도 팔라왕조시대 날란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명상 중에 마라의 악마들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으로 나뭇잎에 그려진 그림. 인도 팔라왕조시대 날란다.

원시불교에서는 명상을 브하와나(bhāvanā) 또는 자나(jhāna).드야나(dhyāna디야나)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려.사유수(靜慮 思惟修)란 의미는 자나(jhāna).드야나(dhyāna디야나)이다. 빨리어로는 자나 산스크리트어로는 드야나(dhyāna디야나)이다.

브하와나는 마음개발의 의미가 있다. 심전(心田)이란 말이 있는데, 마음 밭을 간다는 의미인데, 마음을 닦아서 도를 이룬다는 뜻이다. 불교명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불교의 수행에서 이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개 이 단어는 다른 구와 합성해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찌따-브하와나(citta-bhavana)라고 마음개발(닦음)이 된다. 메타-브하와나(metta-bhavana)라고 하면 자비심개발이 되겠다. 브하와나는 실제로 상좌부권 비구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브하바나’ 또는 ‘브하브나’로도 들린다. 이 ‘v’발음이 ‘ㅂ'냐 ’o'로도 나기 때문이다. 'have'를 ‘해브’라고도 하지만, ‘해우’라고도 발음하는 것을 종종 듣기 때문이다. 아무튼 브하와나는 현대어로 정리하면 ‘영성개발’ ‘정신개발’이 되겠으며, 일반적으로 불교에서의 명상이라면 ‘브하와나’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빨리어 ‘자나’ 산스크리트어로 드야나(dhyāna디야나)는 무슨 의미인가이다. 이 드야나는 힌두교 불교 자이교에서 공통으로 쓰는 용어이다. 그야말로 마음의 조용한 상태를 말한다. 아무 잡념이 없이 마음이 개발된 일련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정려.사유수(靜慮.思惟修)라고 번역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번역도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가장 근사치이다.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에서 정의하는 이 자나 또는 드야나는 ‘완전한 평정과 알아차림의 상태(upekkhii-sati-piirisuddhl)’인 것이다.

한역에서는 드야나를 선정(禪定)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인도에서 부처님 당대나 초기불교 시대에는 드야나의 본래 의미는 ‘완전한 평정과 알아차림의 상태’를 의미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상태에 들어가야 아라한이 된다고 본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원시불교니 초기불교니 해서 부파불교 이전 시대의 불교를 말하는데, 부처님 당대와 직제자 시대를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부처님으로부터 2-3백 년간의 불교를 말하기도 하는데, 부파불교 이전 시대를 말하는 것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부처님께서 성도한 후,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고 있는 장면.
부처님께서 성도한 후,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고 있는 장면.
사원에 갓 들어온 사미승들이 명상 수업을 받고 있다(스리랑카).
사원에 갓 들어온 사미승들이 명상 수업을 받고 있다(스리랑카).

이제 불교명상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상세하게 글을 엮어 가려고 한다. ‘명상의 역사’ 연재가 불교명상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내용을 알고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기에 서서히 정리해 나가고자 한다(계속).

 

마정 보검(磨汀 寶劍)<해동임제 선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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