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는 한국에서 일본에 전해 줘

원로의원 원법스님이 행자들에게 다도 특강을 하고 있다.
원로의원 원법스님이 행자들에게 다도 특강을 하고 있다.

우리 종단에도 차(茶)를 마시는 스님들이 제법 많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특히 불가에서는 차를 본격적으로 마셨다. 물론 신라시대부터 차가 중국에서 전해져서 마셔왔지만, 불가에서 본격적으로 차문화(茶文化)로 발전하여 체계가 잡힌 것은 조선 시대이다. 현대에 와서는 일본이 다도(茶道)를 하고 한국은 그 아류로 생각하는데, 사실 차문화는 조선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원법스님의 다도 특강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다.

원법스님은 가야산 해인강원(승가대학) 출신으로 경학(經學)에도 밝으시고 서예(예서체)에도 일가견이 있으시며 거기에 금상첨화 격으로 다도에 까지 격을 갖추신 큰스님이시다. 어려운 시간을 내서 이번 제 44기 행자교육에 초빙되셔서 귀한 시간을 내서 특강을 해주셨다.

원법 원로스님의 특강을 중심으로 차문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다도란 차를 달여 손님에게 권하거나 마실 때의 예법을 말한다.

차는 처음 음료수의 일종이나 약용으로 등장하였으나 차차 기호식품화하면서 취미생활과 연결되었고, 다시 일상생활의 도를 끽다(喫茶)와 관련지어 다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차는 중국에서 한국에 전해졌다. 하지만 21세기인 현대는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차의 연원은 전설의 시대에까지 소급되지만, 중국의 경우 4, 5세기경 양쯔강(揚子江)유역의 주민들이 애호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도의 성립은 8세기 중엽 육우(陸羽)가 《다경 茶經》을 지은 때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다도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일본 등에 널리 유포되었다.

중국 시안(西安) 시에 있는 육우의 조각상.
중국 시안(西安) 시에 있는 육우의 조각상.

육우(陸羽, 733년 ~ 804년)는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며, 자는 홍점(鴻漸), 호는 상저옹(桑苧翁)이다. 차를 만들고 마시는 것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다경》(茶經) 3권 등을 저술하였으며, 중국의 차 문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육우는 복주(復州) 경릉군(竟陵郡, 현재의 후베이 성 톈먼 시) 출신이며, 3살 때 호숫가에 버려졌다고 한다. 용개사(龍盖寺)의 주지인 지적선사(智積禪師)가 그를 거두어들였으며, 후에 성은 주지의 성을 따 '육(陸)'으로, 이름은 점을 쳐 점괘에 따라 '우(羽)'로 하였다. 그는 말더듬이었지만, 웅변에 능하였다. 육우가 어렸을 때, 지적선사는 육우가 불경을 읽으며 승려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육우는 유교를 배우려고 하였다. 이에 지적선사는 육우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육우에게 매우 힘든 일을 하게 했지만, 육우는 대나무 가지로 가축의 등에 글씨를 몰래 연습하였다.

그 뒤, 육우는 절에서 도망하여 극단에 들어가 배우로 활약했으며, 천보년간(天寶年間)에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제물(李齊物)의 눈에 들어 그의 추천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경릉의 사마(司馬)인 최국보(崔國輔)를 만나 그와 어울렸으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정신'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2]

지덕(至德) 원년 (756년), 육우는 안사(안록산)의 난을 피하기 위해 강남(江南)으로 피신하였고, 상원년간(上元年間)에 오흥(吳興, 현재의 저장 성 우싱 구)에 암자를 만들고 은거하면서 호를 '상저옹(桑苧翁)'으로 하고,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곳에서 육우는 그곳의 승려인 교연(皎然)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여러 차 산지를 돌아다니며 차에 대해 연구하였다. 육우가 은거하는 동인 조정에서 그를 태자문학(太子文學)이나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10년 후인 건중(建中) 원년 (780년)에 14년 동안의 차 연구를 정리하여 《다경》 3권을 저술하였다.

대력년간(大曆年間)에 육우는 호주자사(湖州刺使) 안진경(顔眞卿)과 교제하였으며, 그가 《운해경원》(韻海鏡源)을 저술할 때 편집에 참여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이계향(李季鄕)과의 일화로 〈훼다론〉(毁茶論)을 쓰기도 했다.

정리: 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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