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70〜80 세대로 변한 노승들이 되어

오른 쪽 삿 갓 쓴 이가 원명스님(대흥사)
오른 쪽 삿 갓 쓴 이가 원명스님(대흥사)
대흥사 용화당 천불전 앞(오른쪽 원응스님)
대흥사 용화당 천불전 앞(오른쪽은 원응스님)

동진출가해서 철없는 출가생활을 할 때가 정말 그립다. 60 여년이 지나니 옛 생각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함께 행자시절을 보내고 대흥사 강원에서 사미과 사집과를 마치면서 함께 대중방에서 동고동락했던 도반들은 이제 다 70〜80 세가 되었다. 인연 따라 흩어져서 살아간지 50년 60여년이 지났다. 각자 인연 따라 살아 온 것이다. 나는 놀랐다. 원응(정현)스님을 태고종에서 다시 만 날줄이야!

그때는 태고종이 없었다. 통합종단 시절이다. 이른바 비구-대처가 함께 살 때다. 원응 스님은 주지실에서 근무했다. 주지스님 시봉으로 제법 위세를 부릴 때다. 나는 천불전에서 천일기도 중이어서 도반들과는 묵언으로 지냈다.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아쉽다. 게다가 나는 그 때 기도 맛을 봐서인지 몰라도 한 소식 한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사미들은 눈 아래로 보였다. 물론 나이도 내가 대 여섯 위이기도 하지만, 나는 노전 급이었고 원응 스님은 주지 시봉 정도였다.

은사 스님은 당대에 토굴에서 주로 두타행을 하던 ‘청’자 ‘화’자 스님이어서 제자들도 스승처럼 운수납자의 만행 기질이 있었고, 기도를 주로 하는 스님들이었다. 주지스님이 서울 병원에 가시면서 원응 스님과도 헤어졌는데, 55년 만에 재회했는데, 처음엔 못 알아 볼 정도였다. 너무나 변해버린 것이다. 정답던 도반들 다 어디에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동진 출가자들이 많았다. 다들 어디서 살아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은사스님을 모시고 낙성법회에 참석했을 때 찍은 사진(왼쪽 원명스님)
은사스님을 모시고 낙성법회에 참석했을 때 찍은 사진(왼쪽 원명스님)

은사 스님은 벽산당 금타스님(1898~1948)의 제자이시다. 금타스님은 1919년 장성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으며, 1936년 백양사 운문암 동안 거 수행시절 ‘원각경 삼정관의 이십오 청정법륜으로 용맹정진하여 도통하신 분이다. 부안 내소사 월명암. 내장사 벽련선원과 백양사 운문선원에서 정진하셨고, 1948년 세수 51세, 법납 30세로 입적하셨는데, 제자로는 법련(法蓮), 법능(法能), 청화(淸華) 스님 등이 계신다. 나는 은사스님으로부터 노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지만, 생전에는 뵙지 못했다. 일찍 열반하셨기에 금생에서는 존안을 친견하지 못했지만, 은사스님으로부터 많은 말씀을 들어서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총무원 사무실에 올 때 마다 증조 할아버지격인 만암 스님 사진 앞에서는 묵념으로 절을 올린다. 나도 법맥을 따진다면 만암-금타-청화-원명으로 법맥이 분명하다. 요즘 종단사태로 어설픈 후배들한테 불경한 소리를 들으면 기가 막힌다.

은사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 하겠지만, 참으로 할 이야기가 많다. 나는 성격이 상(相=자랑)내는 것을 싫어해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오직 기도염불로 포교활동을 해오고 있다. 원응 스님이 요즘 시대는 승보(중 족보)도 없는 자들이 더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라면서 지나간 수행생활을 어느 정도는 알릴 필요가  있다고 해서 깊숙이 감추어 뒀던 빛바랜 사진들을 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나고 은사스님의 소중했던 가르침이 귓전을 때린다.

그때는 듣기 싫어서 짜증도 나기는 했지만, 정말 쓴 소리가 보약이고 평생 나를 중답게 살아가도록 경책하는 화두가 되고 있다. 상내지 말고 묵묵히 중노릇하면 그것이 출가자의 본분이라고 말씀하시던 은사스님께는 죄를 지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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