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기도로 살아 온 중노릇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를 찾아서 포즈를 취하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를 찾아서 포즈를 취하다.

불가와의 인연

나는 어려서부터 절과는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우리 선조는 한양에서 해남으로 이전(일종의 유배)을 해서 살았다. 이런 집안 전통에 따라서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배워야 했다. 초등학교 때는 대흥사로 소풍을 갔는데,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살았던 고향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말자 이상하게도 대흥사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마도 전생에 대흥사 스님이었음이 분명하다.

1956년의 일이다. 그때는 응송(박영희)이라는 스님이 주지로 계셨다. 일제 때는 독립운동을 하신 유명한 스님이다. 혜화전문(동국대 전신)을 나오고 만주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신 분으로 해방되면서 대흥사 주지를 하셨다. 태고종이 창종된 다음에는 감찰원장(호법원장)도 하셨고, 말년에는 광주 운천사(전남종무원)에 주석하셨다. 한국불교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 고승이다.

내가 대흥사에 들어가자, 절 내부 사정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정화운동 때문에 대흥사까지도 그 여파가 서서히 미치기 시작했지만 1962년 이른바 비구-대처 간의 화합으로 통합종단이 발족해서 청우스님이 대흥사 주지로 취임하셨다.

나는 이런 혼란기에 승려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흥사에 적을 두면서도 광주 추강사에 가서도 좀 살고 지리산 백장암에서도 사는 등, 그야말로 어려서부터 운수납자로 중생활을 시작 한 것이다. 다행하게도 대흥사 강원에서 사교를 마쳤는데, 당시 강사스님은 김경룡 화상으로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나중에 선암사 강주도 하신 걸로 기억한다.

목포 문태고등학교 한문 선생님도 하시기도 했는데, 호남지역 불교계에서는 대강백으로 이름이 알려진 분이다.

대흥사 노전 시절 대웅보전 앞에서 고성훈 스님과 목탁을 들고 기념촬영.
대흥사 노전 시절 대웅보전 앞에서 고성훈 스님과 목탁을 들고 기념촬영.
통합종단 조계종 승려증
통합종단 조계종 승려증

주필 원응 스님도 대흥사 출신인지라 자꾸 옛날 사진부터 가져오라고 졸라대서 여기저기 뒤져보니 빛바랜 사진 몇 장이 발견되었다. 60년 전의 나를 보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었다. 나는 절에 들어가면서부터 염불에 매력을 느끼고 목탁을 잡고 기도하는 것이 본업이었다. 대흥사 천불전에서 천일기도를 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3년간 천일기도를 하고나니, 어딘지 모르게 힘이 생기고 도를 다 깨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절에를 가면 무조건 법당에 들어가서 목탁을 들고 기도부터 하자, 나를 기도승으로 붙잡는 절이 많이 생겼다. 하다 보니 이절 저절 좀 돌아다니기도 하면서 노전도 보고 기도정진도 해주는 것이 본업처럼 되었다.

백장암에서도 100일 기도를 올렸다. 그때는 초견성(初見性)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기도 발 덕분이었던지 근기(根機)가 생겨서 제법 중태가 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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