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은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맹자(孟子)가 저술한 大學은 유교의 정신을 가장 조직적으로 서술한 책이며 그 근본사상은 유교가 추구하는바와 일치한다.

맹자 왈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군자는 도를 뜻에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정치와종교는 그 목적이 부국강병하고 만민이

안락하고 해탈 열반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불교가 처해있는 현실은 어찌 보면 우리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에 빠져 매몰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본다. 한국불교의 근.현대사를 볼 것 같으면 조선 후기의 명승으로는 연담, 백파 등이 있다. 연담은 각종 기록을 저술해 교학진흥에 크게 기여했고, 백파는 선문수경 등을 지어 선문중흥에 기여 했다. 또 초의는 내외학문에 정통한 고승으로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범해는 불교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동사열전을 썼다.

이밖에도 진하는 선문재정록을 지어 여래선 조사선을 밝힘으로서 종풍을 떨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불교는 승려의 사회적 신분하락으로 도성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했다. 이 치욕적인 법은 1895년 일본승려들의 탄원에 의해 해제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탄압으로 자립기반을 잃은 불교계는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시대사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일합방 후 일본은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하고 31 본산제를 운영했다. 일본은 또 승려의 대처화를 추진해 한국 전통교단의 순수성이 파괴됐다. 이에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 불교의 왜색화에 대항해 항일운동을 했다.

3 1운동 때 불교계는 한용운과 백용성을 민족대표로 참여시켰고, 많은 선각적 고승들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광복이후 한국불교는 다시 시련을 맞았다. 한반도 분단으로 이북지역에서는 종교 활동이 중단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많은 사찰과 문화재가 파괴, 손실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한국 불교계는 일본이 남긴 왜색을 청산하기 위해 정화운동을 시작한다. 정화불사라고도 불린다. 이 정화운동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의 전통 재건, 불교근대화를 내용으로 한다.

정화운동의 계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불교사원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내용의 유시를 내린 것에 근거한다. 본래 대처승은 한국불교의 독신전통과 달리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에 의한 승려의 대처화로 인해 나타난다. 정화운도의 본질은 일본불교의 대처승단 영향으로부터 한국불교의 독신승단 전통을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권, 사찰경제권에 대한 비구,대처 양측의 갈등으로 나타난다.1955년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종권, 사찰경제권이 비구승에게 넘어 왔고, 이를 정부가 공인한다.

1962년 비구,대처 양측이 불교재건위원회에 합의하며 양측의 종단으로부터 종권을 인계받은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6개월 후 대처측이 종회구성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종단에서 이탈한다. 결국 비구,대처 양쪽의 분규는 1970년 이후,양측이 상대종단을 인정한다는 공적인 표명과 함께 종식된다. 비구승은 조계종을 중심으로, 대처측은 태고종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태고종 등 대처측은 사찰의 개인소유를 인정받고,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길 수 있고,또 출가하지 않은 재가불자라도 사찰을 유지,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태고종은 현재 1만 종도(승니) 4천 사찰 3백만 신도를 포용한 대 종단으로 발전했다. 조계종의 뿌리인 태고종은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1천7백년 한국불교의 장자종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장<총무원 문화부장 겸 한국불교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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