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미 넘치는 예인(藝人) 기질 소유자

영우당 자월 대종사가 지난 5년여 주석하면서 화두공안과 씨름한 무문관 서래산방.
영우당 자월 대종사가 지난 5년여 주석하면서 화두공안과 씨름한 무문관 서래산방.
제자들로부터 생일상을 받고 흐뭇해하는 생전의 자월 대종사.
제자들로부터 생일상을 받고 흐뭇해하는 생전의 자월 대종사.

 

IV. 맺는 말

 

사석에서 만난 자월 스님은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다. 자월 스님의 노래 실력은 알아준다. 남인수의 모창 가수인 양,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이다. 자월 스님의 18번 ‘산유화’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그런가하면 붓글씨 실력 또한 대단하다. 곳곳에 자월 스님의 붓글씨 현판이 걸려있다.

종무행정만을 평생 핸들링 한분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인 기질이 다분한 분이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승려들은 시서화차를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시(詩) 서(書) 화(畵) 차(茶)를 하는 것이 기품 있는 승려상이었다. 인도에서의 출가사문상은 발우를 메고 탁발걸식하면서 주유천하하는 방랑객이었다. 그야말로 출가사문이었다.

깊은 고뇌와 번뇌를 떨쳐버리고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었다. 일종의 도 꾼들이었다. 인도에서의 사문상이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사문상이 달라졌다. 다소 정치 성향이었고, 실크로드 상에서는 무역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고 불교는 학문적으로도 심화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오면 도교의 옷을 입고 중국문화와 전통에 적응해야 했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서역에서의 환경과 문화와는 달랐다. 예술성도 지녀야 행세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는 인문교양 지성인이어야 했다.

중국불교는 한국불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 졌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산중으로 들어가면서 이런 인문적인 교양지성을 쌓는데 보다 심화되었다.

조선시대 불교 승려치고 시서화를 모르고 차를 모르면 승려 칭호를 받을 수 없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특히 선사들이나 강사들은 글씨 쓰고 차 마시는 것을 하나의 교양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시를 짓고 그림까지 그린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다는 것은 많은 노력이 소요된다. 자월 스님은 총무원에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붓글씨를 습작해서 근자에는 상당한 경지에 올랐는데 아쉽게 생각한다.

자월 스님은 문하에 백여 명의 상좌를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몇 년 전에는 제자들로부터 생일상을 받고는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입적하기 전 애제자 법승에게는 아마도 곧 갈 것 같다는 암시를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사람이란 가고 나서야 그런 기미를 깨닫는다.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종단이 지금처럼 난마처럼 얽혀서 파국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자월 스님이 생존해 있었다면 어떤 역할이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편백운 총무원장스님 영결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일진광풍이 휘몰아쳐 천지사방을 가늠하지 못하고 오열과 슬픔으로 목이 메일뿐입니다.

 

영우당 자월 대종사님이시여!

 

이다지도 무심하신지요. 출가사문의 가고 옴이 자동문 여닫는 도리라고는 하지만, 자월 스님의 입적이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머리를 맞대고 종단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이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시면 종단과 종도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종단사를 논한다는 말입니까?

 

자월 스님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태고종 총무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평생을 총무원에서 종무행정과 종법의 체계를 세우고 종도교육을 위하여 동방불교대학을 발전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자월 대종사님의 부종수교의 애종 정신과 종단에 헌신한 업적은 길이길이 태고종사에 남을 것입니다. 이제 조용히 쉬시면서 이 사바에서 못다 했던 일들은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상품상생 연화대에서 편안하게 본지풍광의 본래면목대로 법열을 누리시면서 무여 열반락을 누리옵소서!

한국불교 태고종 총무원장 편백운

 

<월해스님 조사>

 

영우당 자월 스님!

이렇게 할 일을 많이 남겨 두고 먼저 가시면 어이 하란 말입니까?

몇 일 후에 만나서 종단을 안정시키는데 머리를 맞대보자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한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지요.

저는 아무래도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영우 대종사님!

 

이승에 아직도 계신다면 말씀 좀 해 보세요. 아마도 대답이 없으시니 입적하심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태산같이 많다던 일복 많은 스님께서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함께 해결하고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데, 너무나 무심하고 원망스럽습니다.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군생들의 가시밭길에서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지 않으시고 연화세계에서 꽃향기 내음 맡으면서 평소 좋아하시던 경 많이 보시고 본래면목 찾는 일에 정진하옵소서!

한국불교 태고종 총무원 전 부원장 월 해

 

 

영우당 자월 대종사는 다음과 같은 임종의 말씀을 남겼다.

 

"인생은 찰라 가운데 있고 돈과 명예는 뜬 구름이다. 세상만사는 오직 마음이 짓고 허무나니 일생동안 떳떳하고 보람차며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하거든 마음 가운데 지혜의 등불(心燈)을 환하게 밝혀 사악(邪惡)함을 경계하고 때때로 성찰하여 천부(天賦)의 심성(心性)이 혼탁(混濁)한 풍진(風塵)에 물들지 않게 해라. 이와 같이 지키고 행하면 평생을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 것이며 임종(臨終)을 맞이하여 후회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월간 불교 통권 1091호 2018.11월호 특별기고:東方學人 石翁 靈祐>

 

<영우당 자월 스님의 영전에 올리는 조시>

 

오호라!

슬픔은 무엇이며 기쁨은 또 무엇이며.

 

태어남과 죽음은 누구의 조작인가요?

왜 하필이면, 황면노사(黃面老師)의 길을 따라

동진(童眞)의 순수함을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전에 철없이 다 받쳤던 구도열정

인생사 험한 가시밭길

무주 백련사 안국사 방랑 삼천리

인연도 묘하지 불이성에 걸망을 풀고

40여 성상을 태고종문에서 필업(筆業)을

시시비비 희비애락 동분서주 기고만장

다 부질없는 일장춘몽인 것을

만사는 다 정해졌는데 괜히 뜬 구름 찾아

헤매는 홀로 가야할 구도의 방랑객이 되어

고래희에 다 접고 급한 발걸음 옮겨

본지풍광 본래면목 화두 들고 서래산방에

차 마시고 붓 놀리고 꽃밭에 물주더니

꽃도 같이 웃고 적상산정 뜬구름도 쉬어간다고

자랑하시던 영우당 자월 대종사시여!

하루아침에 근심 없애는 듯하더니

어인 일로 그리도 빨리 옷을 벗으신지요?

바람도 없는 대적삼매 연화장세계에서

꽃향기 맡으며 하늘 선남선녀들에게

사바의 희비애락 실컷 들려주소서!

영우당 자월 대종사님의 자취는

태고종문의 청사(靑史)에 영원할것이외다.

圓應 頓首 拜

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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