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종정, 총무원장 큰 스님들 직접 모신 산증인

영우당 자월 대종사가 동방불교대학장으로 재직할 때, 선암사에서 기념촬영.
영우당 자월 대종사가 동방불교대학장으로 재직할 때, 선암사에서 기념촬영.

III. 종법과 제도개혁에 대한 소신

영우당 자월 대종사는 태고종의 산증인이며 백과사전이라고 평을 받았다. 태고종 창종 이후 역대종정과 총무원장스님을 직접 모셨던 산증인었다. 묵담 대종사, 대륜 대종사, 덕암 대종사, 보성 대종사, 우백암 대종사, 혜초 대종사를 모셨다. 역대 총무원장 스님들은 덕암 대종사, 남허 대종사, 박영지 대종사, 서봉대종사, 우백암 대종사, 혜초 대종사, 인곡 대종사, 운산 대종사, 인공 대종사를 직접 모시고 종단 행정업무를 봤던 종단 종무행정 전문가였다.

자월 스님 손을 거치지 않은 행정 업무는 전무하다시피 했을 정도로 태고종 사무는 자월스님 손에서 거의 90% 이상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총무원 행정업무는 물론이지만, 종회업무도 자월 스님이 거의 다 핸들링 했다. 요즘에 와서야 3권 분립이라고 하면서 총무원 집행부, 종회, 호법원, 초심원 등의 사무가 분립되어 있었지만, 운산스님 총무원장 때 까지만 해도 총무원에서 거의 모든 종단 행정업무가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태고종 49년 역사에서 자월 스님은 무려 45년 간 태고종의 현대사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 시도 교구 지방교구 종무원, 서울 3사를 비롯한 종찰 현황, 서울경기 직할 사찰 등에 대해서 자월 스님만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종단 실무자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고종 종헌.종법은 통합종단 때 만들어진 종헌.종법 기초위에서 한국불교 조계종-한국불교태고종 종헌.종법이 제정되었다. 통합종단에서 법륜사 측이 분파하고 태고종을 창종하면서도 태고종 창종 주류들은 통합종단에서의 일시적 분파였지 탈퇴나 추방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계종과 태고종과의 정치적 법적 분쟁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현상고착의 결과로 굳어져 가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자월 스님도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허 스님 총무원장 시기에 제종 통합운동 시도가 있었다. 군소종단부터 먼저 통합하고 나중에는 조계종과도 통합하여 한국불교 단일승단을 구성한다는 목표였다.

총무원장 남허 스님의 법상좌이기도 했던 자월 스님은 남허 스님의 이 같은 제종통합 운동은 고려 말 태고보우 국사의 원융무애 화쟁 정신에 의한 제종통합사상에서 연원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불교 역사에서 이미 종파난립으로 불교의 결속력이 흩어졌던 뼈아픈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는 승려가 8천(八賤)의 하나로 까지 추락한 사실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1970년대 한국불교의 지형에서 종단 난립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무모한 제종통합 운동 같았지만, 지금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제종통합운동이었다. 종무행정의 달인 자월 스님은 남허 총무원장 스님의 관점과 통찰에 공감하였고, 결국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통제받고 구속받는 한국불교는 자칫하면 반(半) 관제불교화 된다는 우려를 했던 것이다. 불교재산관리법(이하 불재법)의 통제와 구속을 받던 한국불교는 ‘불재법’이 폐지되자마자, 군소종단이 우후죽순 격으로 창종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불교 이념에 의한 종파 설립이 아니라, 위인창종(爲人創宗)이 유행을 타게 되고 일사(一寺) 일종(一宗) 시대가 되고 무자격 승려(니)가 삭발염의의 탈을 쓰고 큰 스님으로 둔갑하는 곡예가 연출된 것이다. 한국불교의 전통 승가 공동체의 정체성이 훼손되어 버렸고, 시대상황의 경제적 침체와 위기(IMF)같은 혼란기에 무자격 승니들이 대거 승단으로 몰려 들게 되었다.

불재법까지 폐지되자, 돈만 있으면, 법인 설립이 가능하게 되고 설사 무자격 승이라고 할지라도 법적 보호를 받는 제도적 장치가 국가로부터 부여되어서 소위 말하는 적주승니(賊住僧尼: ①도적의 마음으로 머문다는 뜻으로, 불도(佛道)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으로 출가하여 승려와 함께 ... ② 아직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한 사람이 비구의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 승려의 일을 함께 하는 일.)들이 양산되게 되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자월 스님은 이런 현상을 우려하여 태고종만큼은 이런 불명예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월 스님이 이런 종법상의 체계와 제도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총무원장스님들의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자월 스님은 이런 근본적인 종법의 손질과 제도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종권의 직접적인 담당자가 아니다 보니, 생각뿐이었고 이상일 뿐이었다.

게다가 멸빈(滅貧)까지 당하는 불운을 맞았다가 편백운 총무원장 스님이 취임하여 다행하게 복권하는 행운을 얻게 됐고, 명예를 회복하는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자월 스님 당사자에게는 평생 태고종에서 몸 바쳐 일했는데 멸빈이란 중징계를 당하고 보니 너무나 황당했을 것이다.

아무튼 복적 되고 활동을 제대로 하려던 차에 그만 입적하고 말았다. 이번 종단사태를 보면서도 제3 중도세력의 등장을 바랬다. 스스로 어떤 역할을 해보려고도 시도를 하던 차, 평소 심장에 지병이 있던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종단으로 봐서는 너무나 큰 인재를 잃은 것이다.

자월 스님이 염원했던 종법체계의 손질은 지금과 같은 3권 분립의 종법 체계가 아닌 태고종에 맞는 옷(종법)이었다. 제도개혁 또한 50년 전의 종단 제도로는 21세기 현대사회에 부응하는 종단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소신이었다. 누구보다도 종단에 오랫동안 근무를 해왔고 종단행정실무를 봤던 전문가의 입장에서 종법체계의 변화와 제도개혁을 염원하고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종단사태를 초월해서 깊이 생각하고 연구 검토하여 수용해야할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원응<주필>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