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명상을 하고자 하는 목적은 보다 낳은 삶을 위해서

​힌두 성자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63–1902)가 다야나(명상)에 든 모습.
​힌두 성자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63–1902)가 다야나(명상)에 든 모습.

우리가 명상을 하고자 하는 목적은 보다 낳은 삶을 위해서이다. 우리처럼 보통사람들은 명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마음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는 소박한 목적에서 명상에 관심을 갖고 한번 시도해 보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가라면 조금 목적이 다를 수 있다. 보다 전문적인 명상을 원할 것이다. 기독교, 개신교이든 구교이든 간에 보다 예수님 가까이서 성령(聖靈)을 입어 하나님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기독교 이해가 완벽하지 않아서 혹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슬람도 코란을 낭송하고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따라서 알라신의 계시를 받는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자신의 종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하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불교에 있어서도 간단하게 깨닫기 위해서다. 무엇을 깨닫느냐 하는 것은 차차로 풀어 나가겠지만, 부처님이 성취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중국 선종에서는 화두공안을 타파하면 견성(見性)한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려운 퀴즈문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수행을 해보면 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하는 것이다. 일단 뭔가 있다고 전제하고 알려는 답은 뒤로 미루고, 먼저 인도에서의 명상이라고 할까,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공부했는지를 살펴보자. 뭔가 있으니까, 수천 년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의 세계에 뛰어들고 수년 아니면 수십 년 아니면 평생을 바쳐서 마음 닦는 공부를 하겠는가. 일단은 뭔가 있다는 전제 하에 시작해 보자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 이전에는 힌두교의《베다》경전이 있었다.《베다》경전은 네 가지가 있는데,《베다》의 뜻은 지식이란 의미이다. 이《베다》경전들은 베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져 있다. 베다 산스크리트어는 고대인도 아리안의 언어이다. 이 언어는 초기 인도 아리안들의 조상들이 예배용으로 사용하던 언어이다. 이 언어는 아베스타어(Avestan)와의 관련이 있는데, 이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이란어파에 속한 고대 이란 언어의 하나로,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아베스타》에 사용된 언어이다. 베다 산스크리트어나 아베스타어는 인도 유럽어족의 인도-이란어파에 속한다. 아리안 족들은 이란고원을 경유하여 인도에 들어왔는데, 일부는 이란 고원에 남고, 일부는 인도에 들어온 것이다. 베다 산스크리트어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500년까지의 베다 시대 동안 성립된 베다 문헌의 언어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시대까지의 언어가 베다 산스크리트어 시대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카필라 왕궁에서 베다 교육을 받았다는 그림이 아잔타 석굴벽화에 남아 있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는 당대의 프라크리트어(속어)인 빨리어로 설법을 하셨다. 그리고 이 언어로 경전이 성립되었기에《빨리어 경전》이 된 것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다른 세 명의 학동과 함께 아버지의 왕궁 툇마루에서 바라문 승려에게 수업을 받고 있는데, 서판이 그들의 무릎 위에 있으며 과목은《베다》이지만, 무사로서의 전쟁용 도끼 활 등이 있고, 악기도 있으며, 새장도 있고, 처마 아래는 비둘기들이 서식하고 있는 등 고대 인도의 학당의 모습이다. 아잔 타 동굴 벽화 제16호를 선(線)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6세기 CE).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다른 세 명의 학동과 함께 아버지의 왕궁 툇마루에서 바라문 승려에게 수업을 받고 있는데, 서판이 그들의 무릎 위에 있으며 과목은《베다》이지만, 무사로서의 전쟁용 도끼 활 등이 있고, 악기도 있으며, 새장도 있고, 처마 아래는 비둘기들이 서식하고 있는 등 고대 인도의 학당의 모습이다. 아잔 타 동굴 벽화 제16호를 선(線)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6세기 CE).

베다 산스크리트어는 문자가 없이 베다를 찬송하는 슈라우타 전통이라고 해서 구전(口傳)으로 보존되어왔으며, 브라흐미 문자가 발생하기 수세기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슈라우타는 슈루티(श्रुति śrúti)에서 온 말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들음" 또는 "들은 것"이다. 신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 또는 밝혀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계(天啓) 또는 천계서(天啓書)라고도 한다. 슈루티는 힌두교의 핵심적인 정전(正典)을 이루는 경전들을 지칭하는 낱말로, 힌두교의 문맥에서는 지켜야 할 바른 의무 또는 법을 의미하는 다르마(Dharma)의 세 가지 주요 원천들 중의 하나이다. 슈루티에 속한 문헌들은 초기 베다 문헌들의 시대로부터 근대 초기의 우파니샤드의 시대까지 힌두교의 전 역사에 걸쳐 성립되었다.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베다 문헌들의 5대 부류인 상히타(Samhitas)·브라마나(Brahmanas)·아란야카(Aranyakas)·우파니샤드(Upanishads)·수트라(Sutras) 중에서 수트라를 제외한 나머지 네 부류의 문헌들은 모두 슈루티에 해당한다. 너무 전문적인 설명이 되어 버렸지만, 쉽게 풀어서 말하면 문자도 없이 구송(口誦)에 의해서 그 나름대로 편집된 베다경전내용을 구전으로 보존되어 왔다는 것이다. 문자로 기록되기 전, 기원전 1500전부터 기원전 500년 부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산스크리트어를 베다 산스크리트어라고 하고, 기원전 4세기부터 사용한 산스크리트어는 문법학자 파니니에 의해서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정의되고 있다.

이제 정리한다면 인도 침입자들인 아리안들에 의한 언어인 베다 산스크리트어로 성립된 경전이 베다 경전인데, 문자 없이 구전으로 전해졌고, 주로 예배용으로 사용된 산스크리트어로 이해하자. 인도에는 아리안 인들이 침입해서 들어오기 전에 이미 문다족과 드라비다인이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노예로 삼아서 정복한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 전쟁에 능한 유목민인 게르만족의 조상인 아리아인들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를 침입하여 원주민을 정복하여 아리아인들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원주민인 문다족(Mundas)과 드라비다족(Dravidians)의 수준 높은 문화는 아리아인에게 노예계급으로 흡수당한 이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특히 여신을 비롯하여 뱀 신, 수복(壽福) 등에 대한 숭배사상은 힌두교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1200년경 아리아인들은 다신교의 《리그베다》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키고 하늘(天)·비(雨)·바람(風)·우뢰(雷) 등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힘을 신격화 하여 법률신과 창조신으로 숭배하였다. 이 신들은 인간의 생활 속에서 직간접으로 관계를 가지기에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신을 초청하여 제를 올렸기에 그 수는 33신 혹은 3,333신이나 되었다. 인간 자신의 현실적 소망을 비는 기도의 신이라는 존재를 활용한 것이다.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이주 후 처음 만든 성전이《베다》이다.

4 베다 가운데 《리그베다 Rigveda》는 가장 오래된 인도 텍스트이다. 1028개의 송과 10,600개의 운문 시구를 모아 놓은 송집(頌集)이다. 《리그베다》 찬가와 기도문으로 신의 초대가 끝나면 노래하는 제관 우드가트리(udgātṛ)가 《사마베다》 노래를 부르며 제사의 술인 소마를 신께 바친다. 이후 제사의 절차와 형식을 맡는 아드바리유(adhvaryu)가 《야주르베다》의 제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술한 뒤, 끝으로 브라만 승려가 풍요를 기원하는《아타르바베다》 주문을 구송한다. 보다 복잡한 내용은 소개하는 것은 피하겠다. 다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명상의 기원을 찾는데 있어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텍스트로서《리그베다》를 들고 있다는 정도의 인식을 가졌으면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두 명의 힌두 사두가 카트만두의 한 힌두 사원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두 명의 힌두 사두가 카트만두의 한 힌두 사원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마야, 幻影의 거울’이란 그림으로 1910년 미국의 한 예술가가 그린 그림이다.
‘마야, 幻影의 거울’이란 그림으로 1910년 미국의 한 예술가가 그린 그림이다.

힌두명상은 수 천 년 전부터 있어 왔다고 보는데, 그것을 산스크리트어로 다야나(Dhyānaध्यान)라고 부르고 빨리어로는 자나(Jhāna झान)라고 한다. 힌두, 불교와 자이나에서 공통으로 부르는 명상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의 의미는 몸, 마음, 감각과 주위의 환경에 대한 인지를 포괄하는 통일된 깊은 알아차림을 말한다. 다야나(명상)는 실천적 운동이 선행되어야 하고 삼매와 자기인식으로 이끌어야 한다. 목사(mokṣa 해탈)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실재로부터 마야(māyā 幻影 無明)를 떼어 놓는 것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용이 좀 복잡한 듯,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운 감이 있게 전개되었는데, 사실 명상에 대해서 이런 설을 푼다는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이다. 명상이란 언어로 자꾸 설명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명상을 해 보면, 적어도 3개월 또는 1년 정도는 해야 명상의 문턱에 들어간다고 할 것이다. 우선 몸 자체가 적응이 안 되어 있어서 명상 자세 잡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어떤 종교나 다른 전통의 명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자세부터 익혀야 한다. 명상은 그냥 머리로 생각하는 사색이나 사유 활동과 다르다. 불교의 명상에서는 이런 식의 사고활동은 번뇌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앞에서도 언급한 ‘마야’라고 하는 환영이나 무명(無明)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가장 큰 차이는 절대자를 인정하여 믿는 것과 그런 대상은 없다고 보는 관점의 차이이다. 하지만 명상에 있어서 몸의 자세나 정신 집중하는 명상 테크닉은 비슷한데, 일단은 마음부터 안정시켜서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정도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단계를 지나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자신의 정체나 마음의 흐름을 파악하는 심안(心眼)이 나타나게 된다. 우물의 물을 퍼내고 얼굴을 보려면 얼굴이 나타나지 않지만, 잠시 후에 물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자신의 얼굴이 물위에 비추듯이, 명상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단계가 지나면 마음의 안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희열이 있기에 명상을 하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도 어떤 법열과 정신적 희열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명상에 몰두하고 은둔자의 길을 택해서 뭔가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적어도 명상을 하려는 분들은 이런 기본자세부터 가져야 한다. 부질없이 앉아서 허송세월한다는 식의 비난이나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명상은 왜 하는가. 개인적으로 보면,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지만, 어떤 개인이 명상을 해서 지혜를 얻어 사회 공동체에 평화와 안정적인 정신적 영감을 가르쳐 준다면 이런 행위는 공익(公益)이 되는 것이다.

마정 보검(磨汀 寶劍)(해동임제 선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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