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종단 태동과 종회구성을 위한 쌍방 대립

8년 만에 화해하고 통합종단을 완성한 비구,대처측 대표들(1962.1.22.)좌로부터 이청담, 최원허,손경산,이행원, 이남채, 최성용,박승룡, 박대륜, 박추담 스님. 문교부가 주관한 불교재건위원회의 첫 회합을 앞두고 문교부에 모여 회의 진행절차와 재건 공약 제정 등을 협의하고 있다.(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2002년 4월 11일)
8년 만에 화해하고 통합종단을 완성한 비구,대처측 대표들(1962.1.22.)좌로부터 이청담, 최원허,손경산,이행원, 이남채, 최성용,박승룡, 박대륜, 박추담 스님. 문교부가 주관한 불교재건위원회의 첫 회합을 앞두고 문교부에 모여 회의 진행절차와 재건 공약 제정 등을 협의하고 있다.(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2002년 4월 11일)
통합종단의 운영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스님들. 비구, 대처의 양측 대표로 종단의 제반문제를 협의하였다. 서 있는 스님은  이남채 법륜사측 대표(태고종 총무원장 역임)(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2002년 4월 11일)
통합종단의 운영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스님들. 비구, 대처의 양측 대표로 종단의 제반문제를 협의하였다. 서 있는 스님은 이남채 법륜사측 대표(태고종 총무원장 역임)(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200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상황에서 법륜사측 대표스님들이 합류를 거부하고 원종계종을 설립했다. 그렇다면 불교분규이후 통합종단은 왜 실패했으며 원조계종을 창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살펴봐야 이야기가 풀린다. 지루한 싸움 끝에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측(비구.대처)이 통합하도록 해서, 1962년 4월 11일 오후 2시 조계사(태고사) 대법당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새 종정 추대 및 총무원장을 비롯한 임원진의 취임식이 거행됐다. 정부에서도 최고회의 문사위원장(文社委員長)과 문교부장관 등 정계 인사와 교계내외의 명사(名士), 출가 재가의 많은 사부대중이 운집, 엄숙한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됐다고 기록은 전한다.

<태고종사>에 따르면, 이 날의 식전(式典)에서는 효봉 종정스님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루어진 오늘의 화목 단합을 길이 이어가자”는 뜻의 교시와 임석진 총무원장스님과 박문성 감찰원장스님의 취임사, 또 각계 인사의 축사가 있었다. 그와 같이 통합종단이 이루어짐으로써 8년 동안의 불교계 분쟁은 끝이 난 셈이었다.

이렇게 군사정부의 중재로 통합종단이 출범했지만, 정작 화동(和同) 종단의 총무원장이었던 임석진 스님은 종정스님에게 회답한 다음의 서신을 통해서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임석진 총무원장스님의 회신을 소개하고 나서 ‘왜 이런 회답을 보내야만 했던가?’ 하는 연유를 살펴보자.

“ 지난 5월 3일.5월 6일 2차에 걸쳐 보내주신 서한은 봉견하였습니다. 통합된 종단의 원만한 운영을 위하여 걱정하여 주시는 원념(遠念)에 깊이 감하(感荷=은혜를 고맙게 여김)하오며 앞으로 소납이 맡은바 대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전력을 다할 것을 긱오하였나이다.

그러나 일편 생각할 때 먼저 예하께서 그와 같은 서한을 보내주셨고 뒤이어 소납이 이 글월을 예하께 보내드리지 아니치 못하게 된 점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답하나이다.

一.한국불교가 두 갈래로 분열되어 분규를 거듭하고 있던 양측 종단을 대등한 입장에서 이를 화동단합(和同團合) 시킨다는 것은 이는 국가적인 요청인 것이요, 따라서 종단으로서는 숙명적인 해결방안이였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직(本職)은 법리조례(法理條例)를 까다롭게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분규의 요소로 되어 있는 내적인 초점을 화합적인 견지에서 해소시키고자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조정하여 왔기 때문에 총무원직원 임명문제가 오늘날까지 지연되어 왔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二. 5월 3일 자로 보내주신 서한 중의 사항에 대해서는 종헌 제9조 단서의 입법취지 전기(前記) 화동단합의 근본정신에 의하여 감안(鑑案)할 때 독신승으로 임명하라 하심은 적합지 못한 말씀으로 생각되나이다.

三. 동 제 2항과 3항은 심히 죄송한 말씀이오나 이는 본직에 속한 권한으로서 앞으로는 종무운영에 만전을 기하고저 하오니 고한 심려를 거두어 주시기를 삼가 바라나이다.

四. 5월 6일 자로 보내주신 서한 중에 내신(內申)이라는 의미로 되어 있는 말씀은 이는 모든 법규(法規)와 종래(從來)의 관례에 의하면 본직이 임명하게 되었아오니 하량(下諒)하시고 괘념(掛念)치 마시기를 앙망하나이다.

五. 지난 4월 1일 불교재건비상종회 제 8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된 법륜사측 의원일동대표 안흥덕 의원의 건의서 제1항 ‘화동단합의 원칙’ 중 제 3‘각급종단구성의 양측균형선유지(兩側均衡線維持)’라는 조문에 의해서도 소납이 평소에 주장하는 방안이 가장 원만한 타결책 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六. 오늘날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현실에 있어서나 대종단 종무를 경륜(經綸)함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지공무사한 정확한 판단과 원만무결한 인화적인 대책으로 이를 타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예하께서는 이와 같은 점에서 소납이 평소부터 존경하여 모시던 바인데 혹시 그릇된 편견과 고집을 가진 사람들의 선동과 책략으로 말미암아 행여나 예하의 이목을 어지럽게 해서 종단대사를 처변(處辨=사무를 분간하여 처리함)함에 있어서 불미스러운 일이나 없을까 우려되오니 심심한 고려가 게시기를 바라오며 경륜할 일이 있으시거든 수시 소납을 불러서 함께 의논하시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며 법체만중(法體萬重)하시기를 앙축하나이다.“<태고종사> p434〜434.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통합종단이 출범하면서 총무원 임원을 구성하는 데에 따른 저간의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매우 긴박한 상황임을 추리할 수 있는데, ‘화동단합’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서 조계사측과 법륜사측이 화합하여 통합종단을 발족시켰지만, 총무원 임원구성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 내용이다. 문제의 핵심은 종정은 이른바 비구승 측에서 총무원장은 법륜사측에서 당선이 된 것이다. 불교재건비상종회 제 8차 회의에서 가결된 안에 따라서 종정은 이효봉스님이 추대되고 총무원장은 임석진스님이 당선되었던 것이다. 사실 종정은 상징적 존재였으며, 총무원장은 실질적으로 종단업무를 주관하는 집행부의 장으로서 국가로 말하면 국무총리와 같은 격이다.

하지만 종정은 새로 출범한 총무원장에게 “비구승을 우대하여 대처승과는 차별화하라”, “빨리 총무원 직원(국장급 등 실무진)을 임명하라”, “실무직 인선 안배도 비구승을 위주로 하라”는 등으로 서한을 통해 은근히 명령조의 간섭을 해왔다.

임석진 총무원장 스님은 종정의 편지를 두 번씩이나 받고 답장을 하면서 총무원장으로서의 단호한 소신을 피력한 것이다.

군사혁명정부의 중재로 겨우 통합종단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지만 사실상 내부에서는 진통이 그치질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임석진 총무원장스님의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통합은 했지만, 출발부터 신경전의 연속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통합종단이 1962년 4월 11일에 개원하였으나,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야 총무원 행정부서의 각 국장급이 임명되었다. 부장은 이미 임명된 상태였다. 출범하면서 종정 총무원장 감찰원장 감찰원 부원장 및 4개부서 부장까지만 임명되었던 것이다. 7월 4일 오후에야 4개부 8국장이 임명되었다.

총무부 2국장(이대욱. 고광덕), 재무부(강법종.이종명), 교무부(박승룡.김혜정), 사회부(정자원.장상렬)이었다. 종정스님 측에서는 8국장을 전부 조계사측에서 차지하려고 했지만, 임석진 총무원장 스님은 4:4로 국장급을 구성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동원칙을 주장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결과였다.

7월 28일 대한불교조계종은 문교부에 사회단체 등록을 하였는데 대표자는 이효봉(종정), 대표자 대리는 임석진(총무원장)이었다. 통합종단이 새 종회를 구성하려고 했지만 쌍방은 이견대립으로 진통을 겪었다. 조계사측과 법륜사측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현<불이성 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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