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 일으킨 쿠샨왕조

카니슈카 대왕 때의 쿠샨왕조 영토
카니슈카 대왕 때의 쿠샨왕조 영토

실크로드 선상에서 쿠샨제국을 간과할 수 없다. 지(支) 자 돌림으로 시작되는 중앙아시아(서역) 역경승들은 다 쿠샨왕조 출신들이다. 쿠샨 제국은 본래 월지 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쿠샨 왕조(기원후 30년경〜375년경)의 전성기 때는 타지키스탄, 카스피 해,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대제국이었다. 월지 민족이 세웠으며,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등과 교역했다.

'쿠샨'은 중국어로 월지족의 다섯 민족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인 '귀상(貴霜)'에서 왔다. 월지족은 토하라어파의 말을 썼던 사람들을 아울러 부르는 말로, 중국 역사가들에 따르면 휴밀(休密), 귀상(貴霜), 쌍미(雙靡), 힐돈(肸頓), 도밀(都密) 다섯 부족으로 나뉜다. 그들은 원래 타림 분지의 초원에 살았으나, 기원전 176년~160년 흉노에 의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윌지족은 기원전 135년경에 박트리아를 만났고 이를 점령하여 다섯 부족의 나라로 나누었다. 이후 기원전 1세기에 귀상족이 나머지 네 부족을 정복시켰다. '귀상'이라는 이름은 서양에 '쿠샨'으로 전해졌지만 중국에서는 쿠샨 왕조를 계속 월지라 불렀다.

 

월지(쿠샨)족의 기원전 176〜기원후30)년 경 까지의이동경로.
월지(쿠샨)족의 기원전 176〜기원후30)년 경 까지의이동경로.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국가로서 기원전 3세기 중반 경〜~기원전 1세기 중반 경 사이에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이다. 본래 이들은 기원 전 3세기 중반 경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흉노를 압박하고 인도에도 진출할 정도로 강세를 유지했다. 대월지는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가 매우 유행을 하면서 북쪽 실크로드(북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라는 종교가 없었던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해상으로 인한 전파가 아니고 월지에 의한 실크로드 경유로 전파된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

중국 《사기》의 글에는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76년)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대패하여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월지의 영토들도 흉노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이때 일부가 남아서 서쪽으로 간 세력은 대월지(大月氏)라고 이름을 바꿨다고 하며 남아 있던 부족들은 소월지(小月氏)라고 불렸다고 쓰여있다.

기원 전 162년 흉노의 노상 선우의 공격을 받고 월지의 왕이 살해되었다. 월지는 더 서쪽의 아무르 강 주변 소그디아나로 이동하여 대하(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이곳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며 살아갔다. 이때 대월지의 일부는 인도로 들어가 쿠샨 제국을 건국한다. 기원 전 130년경 전한의 장건이 반흉노 동맹을 제안하러 가지만 대월지는 단호하게 동맹을 거절한다.

이후 기원 전 1세기 중반, 강대해진 토하라인의 쿠샨 제국이 월지 땅에서 동서교역도 하면서 대월지는 쿠샨 제국에게 포함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 쿠샨 왕조도 대월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본래 월지국은 둔황과 기련산 사이에 나라를 세웠으나 흉노가 강성해지면서 노상 선우에게 패해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간다. 서쪽에 정착한 대월지의 남쪽에는 대하(박트리아), 서쪽에는 안식(파르티아), 북쪽에는 강거(康居)가 있었으며 동쪽 3천리 떨어진 곳엔 대완이 있었다. 강거는 현재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부 인근 지역에 세워진 지역이다. 강거의 여름 수도가 지금의 타슈켄트라고 추정한다. 인도유럽어족의 이란계 민족이 세운 나라로 위치는 소그디아나의 북쪽이며 대완(페르가나)의 북서쪽 1000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추측한다. 기원전 128년 장건이 방문한 후 기록을 남겼다.

녹색 부분이 스키타이 영역이며 노란색 부분은 인도까지 확장한 영토이다.
녹색 부분이 스키타이 영역이며 노란색 부분은 인도까지 확장한 영토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월지족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보고 있고, 고문헌의 토하라인(Tocharians)과 같거나 긴밀히 연결된 종족으로 믿고 있다. 중앙아시아 연구가인 르네 그루쎄는 당시 서방측의 문헌과 중국 문헌을 종합해보면 월지는 토하라인과 함께 인도-스키타이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당시 그리스의 사가 프톨레마이오스는 월지의 영역을 토가라(Thogara)로 기록해 두었다. 또한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를 침략한 민족을 토카로이(Tokharoi)라고 부르고 있다. 인도-스키타이는 인도-이란 사카의 분파이다. 그들은 남 시베리아에서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간다라, 카슈미르, 펀잡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4세기경까지 인도의 중서부 구자라트, 라자스탄으로 들어왔다. 첫 사카왕은 마우에스 또는 모가는 사카 권력을 간다라에 세웠고 점차 북서 인도에 대한 우월권을 확장하였다. 인도-스키타이의 지배는 서기 395년 루드라심바 3세의 서부 총독령과 함께 끝났다.

스키타이 족에 의한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의 침입은 인도-스키타이 침입으로 언급되는데 인도와 인근 나라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실 인도-스키타이 전쟁은 중국 종족과의 불화에서 중앙아시아 유목 전쟁에 의해 격발된 사건의 한 장이다. 박트리아, 카불, 파르티아, 인도는 물론 로마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스키타이 그룹은 인도로 침입하여 다양한 왕조를 세웠는데, 사카 외에도 파라마 캄보자, 발리카스, 리시카스와 파라다스 등이 있었다.

 

왕립지리학회의 본부 로우더 롯지
왕립지리학회의 본부 로우더 롯지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 역사공부는 지리 공부이기도 하다. 영국은 19세기 중반 아프리카-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왕립 지리학회를 창립했다. 왕립 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는 지리학의 발전을 위해 1830년에 설립된 영국의 학회이다. 오늘날은 세계 지리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학회이며, 연구, 교육, 현장 조사와 탐사를 지원하여 세계의 사람, 장소, 환경에 대한 일반 법칙화와 상세한 이해를 돕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왕립 지리학회는 1830년에 설립된 〈런던지리학회〉(Geographical Society of London)의 명칭으로 ‘지리학의 발전’을 추진하는 연구기관으로 발족되었으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발족한 지리학회이다. 이후 로터리 클럽과 팔레스타인 협회와 비슷한 조직으로 조지프 뱅크스가 1788년에 설립한 옛 아프리카 협회(African Association)를 흡수했다. 많은 학회와 마찬가지로 선택된 회원들끼리 최근의 과학적인 문제나 발상에 대해 논의하는 비공식 만찬을 개최하였던 ‘식당클럽’으로 시작된 것이다.

창립 멤버는 존 바로우 경(Sir John Barrow), 존 프랭클린, 프랜시스 보퍼트 등이 있었다. 윌리엄 4세로부터 후원을 얻게 된 후부터 점차 왕립 지리학회(The Royal Geographical Society, RGS)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1859년에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공인장을 받았다.

왕립지리학회는 많은 저명한 탐험가와 여행가의 주요 관계자, 지원자였다.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찰스 다윈, 데이비드 리빙스턴, 로버트 스콧,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등이다.

로우더 롯지는 1874년에 리차드 노만 쇼가 윌리엄 로우더(Hon William Lowther)를 위해 지은 것으로, 쇼가 활약한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영국 내의 건축물이었다. 1929년에 건물의 동쪽을 증축했고, 새로 지도실과 750석의 강의용 극장을 설치했다. 공식적으로는 요크 공작(이후 조지 6세)에 의해 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식이 1930년 10월 21일에 개최되었다.

 

왕립 지리학회에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왕립 지리학회에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왕립지리학회의 역사 초기에는 식민지탐험, 특히 아프리카, 인도 대륙, 북극, 중앙아시아 탐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찰스 다윈, 데이비드 리빙스턴, 헨리 모턴 스탠리 등 많은 탐험가, 여행가를 지원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왕립지리학회가 지원한 탐사는 수시로 톱뉴스로 다루어졌으며, 학회의 회장과 협의회는 기자나 편집자들로부터 열렬한 취재를 받았다. 또한 학회의 초기 역사는 영국의 지리학계의 역사와 상호 연관되어 있었다. 정보, 지도, 차트, 지식 탐구를 통해 수집된 자료는 왕립 지리학회에 보내져서 현재의 독특한 지리학 컬렉션을 형성하고 있다. 1831년부터 1855년까지 학회에서는 대회와 기타 주제를 게재하는 학회논문집(Society Proceedings)을 발행했다.

이것은 1893년부터 현재까지 발간되고 있는 〈더 지오그래피컬 저널〉(The Geographical Journal)로 대체되었다. 학회는 영국 대학에서 교육, 연구 대상으로서의 지리학을 확립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두 대학 지리학부 설립에 자금을 제공했다.

보검<해동세계불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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