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24종 원통법문과의 비교

창민 스님(불교학박사. 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창민 스님(불교학박사. 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Ⅴ. 24종 원통법문과의 비교

 

佛問圓通,我從耳門圓照三昧,緣心自在因入流相,得三摩提成就菩提斯爲第一.

 

佛이 圓通을 물으시니, 저는 耳門으로 圓照하는 三昧로부터 緣心이 自在하여지고, 因하여 流相에 들어가 三摩地를 얻어 菩提를 成就하는 것이 第一이라 하겠나이다.

 

世尊彼佛如來歎我善得圓通法門, 於大會中授記我爲觀世音號, 由我觀聽十方圓明, 故觀音名遍十方界.

 

世尊이시여, 저 佛如來께서 제가 圓通法門을 잘 얻었다 讚歎하시고, 大會中에서 저를 授記하여 觀世音이라 하였사오니, 저의 觀聽이 十方에 圓明하였으므로 觀世音이란 이름이 十方世界에 두루 하였나이다.

 

소리의 들음(聽音)을 벗어나 音流를 돌이켜 觀照하는 수행법을 통해 삼마지를 얻고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耳根으로 圓通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觀世音이라 수기하였고, 이것은 듣는 것을 돌이켜 觀함으로서 시방이 두루 밝아져 관세음이란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初於聞中 入流亡所라 하여 耳門으로 좇아 圓照를 얻었다고 했으나 圓照를 얻음으로 말미암아 隨緣應化하여 대자재를 얻는 것이요. 다시 또 漸證하여 空과 覺이 원만하고 寂滅을 증득하기에 이르나니 이는 流에 드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깨달음(菩提)를 성취하게 됨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耳根의 圓通으로 三摩地를 얻어 보리를 성취하는 하는 과정을 개운화상은 ‘처음에 듣는 가운데 흐름에 들어가 처소가 없어짐은 곧 귀를 따라서 원만하게 비침을 얻은 것이니, 원만하게 비침을 말미암았으므로 근기를 따라 변화하여 응하시되 크게 자재함을 얻으시며 다음에 또 차츰 더해서 원만하게 空한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적멸을 증득하였으니 이것이 곧 흐름에 들어가는 현상으로 인하여 보리를 성취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원통법문 중에 제일 수승한 것은 耳根圓通의 法門이다. 처음에는 耳門으로 소리에 들어가 소리의 흐름에 觀照하여 그 대상(所)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소리와 대상이 모구 空하여 寂滅하다는 마음마저 사라진 단계가 되어 菩提를 성취하는 것이 지금까지 고찰한 圓通圓通法門의 대체적인 약도이다. 위의 문장은 이근원통법문에 대한 결론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에 능엄경에 제시된 전체 25가지 원통법문 중에 이근원통을 제외한 나머지 24가지 원통법문은 어떠한 것들인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근원통법문의 수승한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난이 어떠한 도리로 삼매에 들어 원통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를 묻자 부처님은 스스로 대답하는 대신 이미 원통을 얻은 대 제자들에게 그 도리를 설하도록 시킨다. 이에 각 제자들이 자진하여 나서서 그 수행과 깨달음의 내용을 부처님께 아뢴다. 이 25가지 원통법문은 욕계중생을 구성하는 조건들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각기 6塵, 6根, 6識, 7大의 어느 한 요소를 관찰의 대상으로 하여 아라한의 과위를 얻게 된 각 아라한들의 회고담이 제시된다. 이를 그 논의된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방법도 있겠고, 18界와 7大로 나누어 살펴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제시된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순서상으로 약간의 예외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먼저 6진의 원통이 있고, 그 다음으로 6근원통법문, 6식원통법문, 7대원통법문이 뒤따른다.

 

 

순서

구분

수 행 자

수행 및 깨달음의 내용

원통이름

1

聲塵

憍陳那

부처님 음성에서 사제의 도리를 해오, 모든 소리가 부처님 음성임을 깨달았다.

聲塵圓通

2

色塵

優婆尼沙陀

백골관, 부정관을 수행하여 색과 공이 둘이 아니며, 그리하여 모든 모양이 부처의 모양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色塵圓通

3

香塵

香嚴童子

침향의 향기를 관찰하여 오고감이 없음을 알아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향기가 부처의 자취임을 깨달았다.

香塵圓通

4

味塵

藥王,

藥上法王子

모든 약의 맛을 보고 관찰하여 약의 성품에 실체가 없음을 알아, 모든 맛이 이 몸과 반응하여 작용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味塵圓通

5

觸塵

跋陀婆羅

목욕을 하다가 몸에 닿는 물이 먼지를 씻어내는 것도 아니고 몸을 씻는 것도 아님을 알아 그 감촉의 원리를 깨달았다.

觸塵圓通

6

法塵

摩訶迦葉,

紫金光比丘尼

모든 현상에 실체가 없음을 알아 모든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깨달았다.

法塵圓通

7

眼根

阿那律陀

부처님의 꾸짖음에 발심하여 7일간 잠을 자지 않다가 눈을 잃게 되었으나, 근본을 돌이켜 비춰 보는 도리를 따라 금강삼매에 들어 깨달았다.

眼根圓通

8

鼻根

周利盤特迦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返照하여 그 호흡에 生住異滅하는 것이 모두 찰나이며 空으로 돌아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鼻根圓通

9

舌根

憍梵鉢提

맛에 대한 분별심을 돌이켜 삼매에 들어가 一味의 청정심을 알고 깨달았다.

舌根圓通

10

身根

畢陵伽婆蹉

몸의 아픔에는 촉각이 있어 이를 느끼지만 깨달음의 청정한 마음에는 아픔과 아픔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다.

身根圓通

11

意根

須菩提

성품에는 자성이 없어 시방이 모두 空하다는 空의성품을 보고 깨달았다.

意根圓通

12

眼識

舍利弗

마음의 청정한 성품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여러 가지 변화를 보고 깨달았다.

眼識圓通

13

耳識

普賢菩薩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서(心聞)깨달았다.

耳識圓通

14

鼻識

孫陀羅難陀

들숨과 날숨으로 코끝의 출입하는 호흡을 관하여 몸과 마음이 안으로 밝아져 깨달았다.

鼻識圓通

15

舌識

富樓那彌多羅尼子

말 재주가 걸림이 없어서(音聲)괴로움과 空을말하고 그 실상을 통달하여 깨달았다.

舌識圓通

16

身識

優波離

몸과 마음을 단속하여 계를 지킴으로써 몸과 마음이 원통 아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身識圓通

17

意識

大目犍連

여래의 가르침인 인연법에 대한 깊은 이치를 듣고 깨달았다.

意識圓通

18

火大

烏芻瑟摩

음욕의 마음을 회광반조하여 몸과 마음의 따뜻한 촉감을 火光三昧로 관하여 깨달았다.

火大圓通

19

地大

持地菩薩

마음이 열리어 몸과 세계의 두 가지 미세한 티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이 본래 여래장임을 관찰하여 無生忍으로 깨달았다.

地大圓通

20

水大

月光童子

물의 성품이 모두 한맛(一味)으로 유통함을 관찰하여 無生忍으로 깨달았다.

水大圓通

21

風大

瑠璃光法王子

바람의 힘으로 몸의 動止와 마음의 動念을 관찰하여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는 無生忍을 얻어 깨달았다.

風大圓通

22

空大

虛空藏菩薩

몸은 마치 허공과 같아 허공과 몸은 경계의 구별이 없다는 무변함을 관찰하여 無生忍으로 깨달았다.

空大圓通

23

識大

彌勒菩薩

허공을 다하여 모든 불구토의 깨끗함과 더러움은 모두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偏計所執性을 관찰하여 無生忍으로 깨달았다.

識大圓通

24

根大

大勢至法王子

염불삼매로 끊어짐이 없이 청정하게 염불을 하면 선택할 필요도 없이 六根모두를 잘 이끌어 삼마지로 無生忍을 얻어 깨달았다.

根大圓通

25

耳根

觀世音菩薩

聞‧思‧修로 三摩地에 들어가 六結인 動 →靜 →根 →覺 →空 →滅을, 순차로 매듭을 풀어서 寂滅상태의 妙音으로 金剛三昧에 들어 깨달았다.

耳根圓通

위 도표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耳根圓通法門이 25번째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순서에 있어서도 그것이 가장 최고의 결론적 수행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24가지 원통수행법과 이근원통 수행법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다른 모든 수행법이 대상경계에 대한 관찰을 핵심으로 하므로 그 다양함을 상대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이에 비해 이근원통의 수행법은 소리를 보는 이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는 것이므로 한 도리에 귀납되어 수행에 수고로울 일이 없다.

이 법문을 총결 짓는 게송에서는 그 각각의 수행법이 耳根圓通法과 달리 쉽게 원통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를 밝힌다. 우선 소리(聲塵)는 이름과 의미가 간섭작용을 일으켜 하나의 소리가 일체를 포함하지 못하므로 분별없는 자리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音聲이 섞이어서 言語가 된 것, 오로지 名詞들과 句節과 意味한 말이, 모든 뜻을 包含못하니,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音聲雜語言, 但伊名句味. 一非含一切, 云何獲圓通.)

 

音聲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지금 여기에서 六塵을 가린 것은 色이 능히 想을 일으키고 塵을 얽히게 하여 情性으로 하여금 사무치지 못하게 하고, 聲은 오직 句節과 의미에 국집하여 두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모양(色塵)은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아무리 정밀해도 궁극적으로 밝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분별적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외명철의 圓通함에 쉽게 도달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色塵이란 妄想이 맺히어 된 것, 心精으로 알려면 뚫지 못하리. 分明하게 뚫을 수 없는 것으로,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色想結成塵, 精了不能徹. 如何不明徹, 於是獲圓通.)

 

精了에 대하여 일귀는 정맥소의 문장을 인용하여 ‘精了라는 말은 色을 만약 마음을 내어 일부러 정미롭게 알려 한다면 마침내 透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향기(香塵)는 다양한 감각의 느낌이 종합되어 감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은 항상 일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圓通함을 얻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香塵이란 鼻根에 합해야 알고, 떠나면 애초부터 있지 않나니, 恒常하지 아니한 所覺으로서,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香以合中知, 離則元無有. 不恒其所覺, 云何獲圓通.)

 

향기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전종식은 ‘香嚴童子가 얻은 원통을 비판하는 것이다. 향엄동자는 향으로 인하여 解悟하여 얻은 이름이다. 보살을 동자라고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맛(味塵)은 그것을 구성하는 맛과 냄새와 닿음이 혀와 만나 일어나는 지각작용이다. 그러므로 코(鼻)라는 감각기관이 없으면 맛도 성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쉽게 圓通함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맛의 성품 本然한 것이 아니요, 맛보는 그 때에만 있는 것이니 恒常있지 아니한 그 성품으로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味性非本然, 要以味時有. 其覺不恒一, 云何獲圓通.)

 

맛(味)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전종식은 ‘약왕과 약상 두 법왕자가 얻은 원통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입으로 이 사바세계의 풀, 나무, 쇠붓이, 돌을 맛을 보아 세상의 훌륭한 의사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였기 때문에 법왕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감촉(觸塵)은 대상과 觸根이 만나 일어나는 지각작용이다. 촉근이 없이 감촉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쉽게 圓通함에 이르지 못한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觸이란 所觸으로 밝혀지나니 所 없으면 觸함을 밝힐 수 없어 合과 離의 성품이 一定챦거니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觸以所觸明, 無所不明觸. 合離性非定, 云何獲圓通.)

 

감촉(觸)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전종식은 ‘觸感으로 원통을 얻은 발타파라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목욕을 하면서 홀연히 물로 인하여 水因을 깨닫고, 이미 때를 씻은 것도 아니며, 또한 몸을 씻은 것도 아니데 그 가운데에서 편안하여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음으로 대상(法塵)은 나의 앎과 대상의 존재가 만나 일어나는 인지작용이다. 그런데 아무리 정확한 인지작용이라 해도 결국은 그 관찰하는 대상이 있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을 넘어설 수 없다. 주객관이 둘로 나뉘므로 圓通함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法이란 內塵이라 일컫는 것이 塵이라면 處所가 있어야 하며 能所라면 遍涉하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法稱爲內塵, 憑塵必有所. 能所非遍涉, 云何獲圓通.)

 

法塵에 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法塵은 相이 아닌 것을 獨自的인뜻으로 일부러 반연하여 안으로 意根에 숨은 것이니 內塵이라 칭하는 것’으로 설명라고 있다.

보는 기관(眼根)은 아무리 밝아도 눈의 앞쪽 부분만 보고 뒤쪽 부분은 보지 못한다. 전체를 함께 보지 못하므로 쉽게 圓通을 얻을 수 없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보는 성품 아무리 洞然하대도 앞만 보고 뒤로는 보지 못하여 四維에서 하나 半 모자라는 것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見性雖洞然, 明前不明後. 四維虧一半, 云何獲圓通.)

 

보는(見) 성품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전종식은 ‘아나율이 얻은 원통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부처님 앞에 자다가 꾸지람을 듣고 자지 않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눈이 멀었는데 그 후 金剛三昧로 본래의 보는 성품을 즐겨 눈으로 시방세계를 보지 못하지만 참 정기가 환히 열려서 마치 손바닥에 있는 과일을 보는 것 같이 되어 천안통을 얻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코의 기관(鼻根)에서 지각하는 호흡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찰나로 분할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은 완전히 별개이다. 이렇게 관찰할 수 있는 전체성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圓通을 얻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鼻息은 出과 入에 通하지마는 現前에 交叉하는 기운이 없어 支離하여 鼻入에 交涉 없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鼻息出入通, 現前無交氣. 支離匪涉入, 云何獲圓通.)

 

코(鼻)로 숨 쉬는 성품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개운화상은 ‘코는 중간 교차할 적에는 기운이 끊어지므로 支離라고 한 것이니 周梨가 숨 쉬는 것을 관할 적에는 비록 功能이 있었으나 중간 교차할 적에는 기운이 끊어지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혀의 기관(舌根)으로 지각하는 맛은 상호의존적이다. 혀의 감각기관과 맛이라는 대상사물이 하나로 만나야 성립하는 것이 혀의 감각인 것이다.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관찰하는 것으로 圓通함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舌入은 無端하게 있지 아니해 맛으로야 覺了함을 내게 되나니 맛 없으면 覺了도 있지 않거늘 어떻게 圓通을 얻사오리까?(舌非入無端, 因味生覺了. 味亡了無有, 云何獲圓通.)

 

혀(舌)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혀가 맛을 인하지 아니하고도 능히 분별할 수 있다면 無端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몸의 감각기관(身根)은 감촉하는 대상물과 감촉하는 주체가 하나로 만날 때 촉각의 작용을 인지한다. 그런데 감각기관과 대상사물은 둘로 나뉘어 서로 뒤섞이지 않으므로 이를 관찰대상으로 하여서는 통합적 앎, 즉 圓通에 이를 수 없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身根이란 所觸과 마치 한가지 둘이다 뚜렷하온 覺觀 아니니 涯量을 冥會하는 수가 없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身與所觸同, 各非圓覺觀. 涯量不冥會, 云何獲圓通.)

 

몸(身)의 감촉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개운화상은 ‘몸은 感觸의 대상과 각각 한계의 차이를 이루나니 몸은 느낌이 있고, 대상은 느낌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 하고 있다.

다음으로 알아차리는 기관(意根)은 이러저러한 생각을 지각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생각이란 것 자체가 단일하지 않은 무수한 잡념들을 가리킨다. 어지러운 생각과 원통한 깨달음은 양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지러운 생각들을 관찰대상으로 삼는 이 수행법으로는 圓通함에 이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知根이란 亂思가 섞인 것이며 湛了함을 마침내 볼 수 없나니 想念을 超脫하는 수가 없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知根雜亂思, 湛了終無見. 想念不可脫, 云何獲圓通.)

 

意根에 대한 깨달음에 대하여 전종식은 ‘수보리의 원통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해공 제일인데 覺의 성품이 眞空임을 알고 空性이 원만히 밝아져 아라한을 증득하였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눈으로 보고 알아차리는 의식(眼識)은 대상사물의 모양(色塵), 그것을 지각하는 감각기관(眼根), 그것을 알아차리는 의식(眼識)의 세 가지가 하나로 만나 일어나는 작용이다. 이 중 어느 하나가 빠지면 알아차리는 의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관찰로 통합적 앎, 圓通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識見은 세가지(根塵識)가 和合해 된 것 根本을 따져보면 非相이라 해 自體가 애초부터 決定챦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識見雜三和, 詰本稱非相. 自體先無定, 云何獲圓通.)

 

識見에 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삼사화합이란 根境識을 가리킨 말이다. 眼識은 三者和合을 말미암은 것이니 이를 궁구하면 본래 스스로 體가 없기 때문에 非相이라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귀로 들어 알아차리는 의식(耳識)은 소리를 지각하여 알아차리는 일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보현보살이 귀의 감각기관이 아닌 마음으로 들어 알아차렸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미 일정한 경계가 아니면 이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수행의 축적이 있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큰 서원이 없다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계인 것이다. 초심자가 쉽게 들어가 圓通함에 도달하는 길이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心聞이 十方界에 洞然한 것은 큰 因緣의 힘으로 생긴 것이라, 初心으론 들어가지 못하올 것을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心聞洞十方, 生於大因力. 初心不能入, 云何獲圓通.)

 

마음으로 듣는(心聞)것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보현보살은 마음으로 듣기 때문에 능히 타방 沙界外事를 아는 것이니 이는 법계의 만행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大因이 생긴 것이기에, 初心이 능히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의식(鼻識)을 대상으로 수행할 때 손타라난타가 그랬던 것처럼 코끝이 하얗게 보이도록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이 때 진여는 머묾이 없는데 코 끝에 마음을 머물게 하므로 진정한 圓通法門이 아니다. 그래서 이 법문을 손타라난타를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법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鼻想은 本來부터 權機인지라 마음을 붙들어서 머무르게 함 머문다면 마음도 머무를 것이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鼻想本權機, 祇令攝心住. 住成心所住, 云何獲圓通.)

 

호흡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개운화상은 ‘孫陀는 마음이 산란하거늘 부처님께서 그 마음을 붙잡아 주기 위하여 코끝을 보게 하였으니 이는 다만 방편 일뿐이고 진심은 그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머무름이 없으니 진심이 머문다면 이는 허망한 것’이라고 해석 하였다.

혀에서 일어나는 의식(舌識)에는 설법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 설법은 이름과 구절을 동반하여 자칫 의미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의미는 분별사유에 기초한 것으로 진여와 하나로 만날 수 없도록 하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를 통한 수행으로는 圓通함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說法은 音聲. 文字 戱弄하는 것 먼저부터 開悟한 이어야 하는 일 名과 句는 無漏가 아니옵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說法弄音文, 開悟先成者. 名句非無漏, 云何獲圓通.)

 

法을 설하는 말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부루나의 설법제일은 舌識을 말미암아 발한 것으로 알음알이(開悟)가 먼저 이루어지게 되는데, 초심자에게는 마땅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 하였다.

다음의 계율은 몸을 단속하는 의식이다(身識). 가사 몸이 없다고 한다면 계율은 지킬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을 단속하여 계율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산란한 망념까지 단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두루 갖추지 못하므로 이를 통한 수행으로는 원통함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戒律을 갖고 犯하는 일 이몸 團束뿐 몸 아니면 團束할 것도 없어요 元來가 온갖 것에 두루 않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持犯但束身, 非身無所束. 元非遍一切, 云何獲圓通.) 

 

持戒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우파리의 지계는 수행자로 하여금 범하지 못하게 하여 다만 一身을 단속하고자 한 것 뿐이니 다 갖추지 못하고 두루 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마음을 인식하는 의식작용이다(意識). 마음의 의식은 대상에 의한 분별심과 차별심이 작용하여 앎이니 이것은 妄念과 妄緣으로 그 대상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통제일의 목건련이라 하더라도 신통은 宿世의 인연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통으로 妄念을 반연하지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圓通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神通은 本來부터 宿世의 因緣 法塵을 分別함관 關係가 없어 念의 緣은 物質을 못 여의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神通本宿因, 何關法分別. 念緣非離物 ,云何獲圓通.)

 

神通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 성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전생이나 이생에서 어떤 수련이나 靈으로 인하여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통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개운화상은 ‘목련의 신통력은 생각과 인연이 뜻과 같았으나 이는 숙세의 훈습에 근본 한 것이지 의식에 관계된 것이 아니며 또 생각이 있고 인연이 있음이 원만하게 통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음은 물질이라는 대상을 놓고 작용을 인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地大). 지지보살이 마음으로 땅을 평탄하게 닦아 觀한다고 해도 이것은 하는 것이 있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有爲法이다. 유위의 성품은 眞如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圓通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地大의 성품으로 觀察한다면 굳고 막혀 通達하지 못하였으니 有爲法은 聖人의 성품 아닌데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若以地性觀, 堅礙非通達. 有爲非聖性, 云何獲圓通.)

 

흙의 성품(地)은 땅이 본래 견고하여 장애가 되므로 통달되지 못하는 것이고 이를 평탄하게 작업하여 남들이 보행하기 좋도록 함에 따라 깨달았다는 것은 인연에 따라 행하는 유위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지지보살의 땅을 고르고 메우는 것이 오히려 有爲에 涉獵되는 것이기에 실다운 聖性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물의 성품을 인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水大). 우리의 몸속에 있는 물의 성분을 관찰하면 눈물, 콧물, 침, 정액, 대 소변 등이 몸속에서 하나 같이 똑 같은 물의 성품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러한 대상을 하나로 觀한다고 해도 觀한다는 想念은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如如한 이치는 觀하여 깨달았다는 생각도 없고 또 관찰해야 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관찰로는 圓通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水大의 성품으로 觀察한다면 想念은 眞實하지 않은 것이요 如如는 覺觀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若以水性觀, 想念非眞實. 如如非覺觀, 云何獲圓通.)

 

물(水)의 성품은 대상이 없어 항시 고요하기 때문에 관찰하여 깨닫는 대상이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月光의 水觀도 아직 想念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如如에 계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대개 如如한 이치는 覺觀(분별)의 法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불의 성품을 인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火大). 淫慾의 불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끊고 또 일어난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음욕이 싫어서 끊는다고 하는 것은 음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圓通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火大의 성품으로 觀察한다면 싫어함은 참 여읜 것이 아니며 初念으로 行할 바 方便 아닌데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若以火性觀, 厭有非眞離. 非初心方便, 云何獲圓通.)

 

淫慾이란 상대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난 욕망이다. 그 욕망은 일시적이고 분별심에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이러한 욕망자체가 원래 실다운 것이 아니기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자체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끊어야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개운화상은 ‘오추슬마는 애욕의 불길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것이 싫어서 벗어날 마음이 생겼으니 이는 있는 것을 싫어한 때문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바람의 성품을 인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風大). 바람의 성품은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의 상대가 있기 때문에 시방의 중생들은 지각과 분별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圓通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風大의 성품으로 觀察한다면 動과 寂의 相對가 없지 아니 해 相對라면 無上覺 될 수 없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若以風性觀, 動寂非無對. 對非無上覺, 云何獲圓通.)

 

바람(風)의 성품을 관찰하여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바람의 실체는 중생의 번뇌와 같이 항시 일시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번복되어 진다. 그러나 중생의 번뇌는 번뇌를 일으키는 대상을 관조하여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소멸시킨 후, 소멸시키는 마음까지도 사라져 깨달음을 증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의 성품은 움직이는 힘(動力)과 고요함의 힘(靜力)은 항시 상대적이어서 그 두 힘(力)을 觀照하여 소멸시킨다는 것은 虛妄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전종식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琉璃光法王子의 風大원통을 비판하는 글이다. 그는 이 세계와 중생의 몸이 모두 妄緣과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임을 관찰하고, 여러 가지 움직이는 성품들이 와도 온 곳이 없었고 가도 간곳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움직이는 힘(風力)의 의지할 데가 없음을 관찰하여 보리심을 깨닫고 삼마지에 들어가 시방의 부처님과 합일해서 오묘한 마음 하나로 이어가는 것이 제일이라고 주장한바 있었다. 그러나 바람 성품을 관찰해 볼 때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상대 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것은 無上覺이 아니어서 그것으로 원통증득은 안 된다는 것이다.

 

허공의 성품을 인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空大). 깜깜한 것(晦昧)이 허공이 되었음으로 허공은 느끼는 감각기관이 없다. 당초부터 어둡고 둔하여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없는 허공과 보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圓通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空大의 성품으로 觀察한다면 昏鈍은 애초부터 覺이 아니요 覺 없으면 菩提와는 다른 것이니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若以空性觀, 昏鈍先非覺. 無覺異菩提, 云何獲圓通.)

 

허공의 성품은 원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관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것은 나로 인하여 대상이 존재하고 그 존재로 인하여 이를 돌이켜 비춰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두가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전종식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虛空藏菩薩의 空大 원통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허공이 끝이 없음을 관찰하여 삼마지에 들어가 妙力이 圓明하게 되어 원통을 얻었는데, 그러한 크나 큰 신비의 힘은 四大가 의지할 데가 없어 망상으로 生滅하는 것으로서 허공과 다름이 없었으며, 부처님 나라와 본래 같은 것이었음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같은 데에서 광명이 일어나 무생인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의 혼돈은 당초부터 깨달음이 아니어서 깨달음 없는 것은 보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것으로 원통증득은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없어(識大) 시시각각으로 변하므로 그 관찰하는 意識이 생각마다 生하고 滅하는 것이다. 미륵보살은 唯識觀을 닦았으나 인식하고 있는 識의 성품은 항시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붙들어 두고 觀한다는 것은 허망한 것이므로 圓通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識大의 성품으로 觀察한다면 觀하는 惟識부터 常住 아니요 마음을 둔다는 일 虛妄하거늘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若以識性觀, 觀識非常住. 存心乃虛妄, 云何獲圓通.)

 

인식하는 성품(識에) 관하여 일귀는 계환해의 문장을 인용하여 ‘彌勒은 唯識觀을 닦았으나 觀한 바 識이 念念에 생멸하니 마음을 두어 이를 觀한다면 이미 妄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원통을 얻겠는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諸行은 무상하여(根大) 항상 변하는 것이므로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성품(念性)은 한 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멸하는 것이다. 즉 念할 때는 生하고 念하지 않을 때는 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生하고 滅하는 인연에 의하여 머무는 과업이란 구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대세지보살의 염불행은 생멸하는 因을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 생멸의 果를 얻기란 그 느낌이 다르므로 염불행으로 圓通을 쉽게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모든 行은 本來가 無常한 것이 念하는 성품부터 元來가 生滅 原因과는 다른 果 얻은 것인데 어떻게 圓通함을 얻사오리까?(諸行是無常, 念性元生滅. 因果今殊感, 云何獲圓通.)

 

諸行의 성품에 대한 깨달음에 관하여 전종식은 ‘諸行은 무상하여 항상 하지 못하고 우리가 眞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妄念은 본래부터 생멸하는 것이어서 그러한 망념을 가지고(因) 果地인 如來地에 이르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으로 六塵, 六根, 六識, 七大 등 25가지 원통법문에 관하여 관세음보살의 耳根圓通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문수보살을 통하여 耳根圓通을 제외한 24가지 원통을 증득한 대아라한과 보살들의 깨달음을 평가한 내용도 게송으로 살펴보았다. 그 게송에서는 한결같이 耳根圓通이 최고의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승한 것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의 근기가 높은 대 보살들과 아라한의 깨달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속세의 중생들에게 耳根圓通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가 있고 최고의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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