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의 불교와 노장사상

노자(前571〜471)
노자(前571〜471)
장자(전369년〜286년)
장자(전369년〜286년)
구처기(丘處機):1148〜1227)
구처기(丘處機):1148〜1227)

전회에서 불교 13경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중국불교에서 확정한 불교13경을 차례로 소개하기에 앞서서 먼저 알아 두어야할 지식은 중국의 도교와 격의 불교 그리고 유교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불교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수용되면서 페르시아적인 사유와 문화가 가미되었고, 이른바 서역불교는 중국에 수용되면서 중국사상인 도교와 부딪치게 된다. 불교는 도교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독교가 중국에 수용되면서 유일신은 제석천왕이나 옥황상제로 대치되고, 한국에서는 ‘하나님’으로 치환되었듯이 지역에 따른 당대의 최고신으로 명칭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교가 중국 땅에 발을 디디려고 하니 걸림돌이 너무 많았고,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불교사상과 사촌 쯤 되는 도교의 술어와 개념을 차용하지 않으면 중국인의 사유에 진입하기가 힘들었고 도교적 불교를 창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격의불교(格義佛敎)이다. 격의불교는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魏晋時代:220〜420)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연구)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인도적 사유와 여기에 가미된 페르시아의 사유를 이해시키느냐에 주안점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 바로 격의불교다. 불교 경전인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노장사상의 ‘무(無)’ 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위진시대(魏晋時代:220〜420)에는 노장사상에 관한 학문이 성행하여 청담(淸淡: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고상한 이야기.)이 유행하였고 특히 노장사상과 유사한 표현 형식을 갖는 《반야경》과 《유마경》이 애독되었다. 그리고 이 경전들을 노장사상과 유교의 역(易:주역)의 사상과 대비하여 연구 토론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그 결과 불교의 공(空)의 의의에 관하여는 본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여러 가지 중국적 해석이 다투어 생겨났다. 이른바 이와 같은 철학적 격의를 특히 현학(玄學:노자와 장자 일파의 학설)이라 부른다.

현학(玄學)은 기원후 3세기에서 6세기에 성행한 중국철학의 한 학파이다. 유교와 도교를 혼합하여 《역경》, 《도덕경》, 《장자》 등을 재독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세 책을 ‘삼현(三玄)’이라 부르며 숭상했기에 현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표적인 현학자로는 왕필(중국 위나라의 학자(226~249). 자는 보사(輔嗣). 위진 시대 노장학(老莊學)의 시조로 불린다. 저서에 ≪노자주(老子注)≫, ≪주역주(周易注)≫가 있다.) 과 곽상(중국 서진(西晉)의 사상가(?~312). 자는 자현(子玄). 사도연(司徒掾)과 사공연(司空掾), 태학 박사(太學博士),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을 역임했다. 위진 남북조 시대 현학(玄學)의 대표적 인물로서 노장의 신비주의 사상을 신봉하였다. 저서로 ≪장자주(莊子注)≫가 있다.)이 있으며, 이 두 사람은 각각 《도덕경》과 《장자》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한자 玄이란 기본적으로 ‘어둡다’는 뜻이지만, 더 나아가 ‘애매하다, 알 수 없다, 미스터리, 신비주의’라는 뜻이기도 하며,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정통 유교가 수기치인, 경세치국의 학문으로써 개인의 인간성을 수양하고 또한 세상을 평안케 하는 형이하학적인 정치철학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현학은 상술한 玄의 의미와 같이 밀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탐구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난세 와중에 국가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노미 상태가 펼쳐지자 현학자들 및 현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개인의 보신과 영달에 힘을 쏟으며 자연을 즐기고 미신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현학은 청담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과시주의, 허무주의로 변질되었다.

동진(東晉:317〜420)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道安: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는데,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이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되었다.

비록 도안이 격의불교의 폐단에는 실패했지만, 도안의 공적은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승단생활의 의식과 규범을 새로이 제정하였다. 경전의 강의와 설법의 순서, 부처(佛)에게 공양 하는 방법, 수업의 방법, 참회의 의식 등이다. 당시까지 승려는 출신지나 스승의 이름을 성(姓)으로 하였으나 도안(道安)은 이것을 폐하고 불교는 석존(釋尊)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승은 모두 석(釋)을 성(姓)으로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이름도 축도안(竺道安)에서 석도안(釋道安)이라고 고쳤다.

당시까지 내려오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오류를 반성하고, 불교는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반야경(般若經)》의 여러 다른 번역본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참다운 뜻에 이르도록 노력하였다. 당시까지의 한역경전(漢譯經典)을 정리하여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위경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이라는 최초의 한역불경(漢譯佛經)의 총목록을 편찬하였다. 경전의 내용은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3단계, 즉 3분과로 성립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확립하였다. 이 3분과(三分科)의 방법은 후세의 규범이 되었다.

중국 신강성 쿠차의 키질 석굴 입구의 광장에 세워진 쿠마라지바의 동상.
중국 신강성 쿠차의 키질 석굴 입구의 광장에 세워진 쿠마라지바의 동상.

쿠마라지바(Kumārajīva)인 구마라습鸠摩罗什)은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의 불교 사상가다.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중국 후진(後秦) 시대 장안(長安)에 와서 약 300권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 유명하며, 그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 삼장법사(三蔵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 많은 삼장이 등장하였다. 쿠마라지바는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는다. 이제 다시 격의 불교에 이념과 사유의 틀을 제공했던 도교 이야기로 담론을 전개해 보자.

도가(道家)의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중국사상(中國思想)의 여명기인 춘추전국시대 이래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하나로, 대표적인 사상가는 노자와 장자이며, 전국시대 중기에 유가와 함께 유력하였다. 도가는 참된 길, 즉 도(道)는 인위(人爲)를 초월한 곳에 있으며 그것은 직관에 의해 체득되는 것으로 사람은 그 참된 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 인위(人爲)를 배제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될 것을 권했는데, 배제해야 할 인위(人爲) 중에서 주된 것은 유가의 도(道)라고 할수 있는 인(仁)이나 예(禮)라고 말했다.

바다를 건너고 있는 중국의 팔선.
바다를 건너고 있는 중국의 팔선.

도교(道敎)는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로서, 신선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음양·오행·복서·무축(신령과 통한다고 하는 박수)·참위 등을 더하고, 거기에 도가(道家)의 철학을 도입하고, 다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 도교는 크게 도교 경전으로서의 《도장》, 도교 사원으로서의 도관, 도교의 성직자 또는 전문적인 종교인으로서 도사·여도사의 체제를 갖춘 교단 도교(敎團道敎) 또는 성립 도교(成立道敎)와 이에서 벗어난 도교 단체 또는 도교 신앙을 통칭하는 민중 도교(民衆道敎)로 구분한다. 현세이익적인 면도 있지만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 도교에 비해 민중 도교는 전적으로 현세 이익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도교의 창시자는 오두미도 또는 천사도의 창시자인 후한(25~220)시대의 장도릉(34~156)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북위(386~534)의 구겸지(365-448)로, 구겸지는 도교를 집대성한 사람 또는 최초의 교단 도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인 황제(黃帝)와 도가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를 신봉한다고 하여 황로사상(黃老思想) 또는 황로교(黃老教)라고도 한다.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선인(仙人)은 신선(神仙·神僊)이라고도 말한다. 처음에 선인은 인간과는 별개의 신(神)으로 간주되어 방사(方士: 일종의 샤먼)의 중개로 인간에게 불로불사의 약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뒤에는 도가 사상과 결합되어 인간이 수행에 의하여 이룩할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선인은 초인적 능력을 지녔으며 속세를 초월한 불로불사의 존재로서 중국인의 이상적 인격상(人格像)이다. 신선설(神仙說) 또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은 불로불사의 신선 또는 선인(仙人)이 실재한다는 것과 인간이 선인이 될 가능성을 가졌다고 믿는 사상이다.

4세기가 되면서부터 신선사상은 불사(不死)를 얻기 위한 여러 방법과 함께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의해 체계가 세워져 비로소 도교에 도입되었으며, 신천사도(新天師道)와 모산파에 의해 도교의 중핵적(中核的)인 요소가 되기에 이르렀다.

《도덕경道德經》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노자(老子)》로도 불린다. 노자는 이 저서에서 전체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삶을 살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장(長)이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중국 철학자 펑유란(馮友蘭)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갖추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자》는 도가 계열의 책으로 여러 사람의 글들을 편집한 것이다. 33편이 현존하며, 내편(內編), 외편(外編), 잡편(雜編)으로 나뉘는데, 전통적으로 장자 자신이 이 책의 내편을 썼고, 그의 제자와 같은 계열의 철학자들이 외편과 잡 편을 썼다고 본다. 장자 자신이 어느 부분을 직접 저술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찾기 어려우나, 내편의 〈소요유(逍遙游)〉, 〈제물론(齊物論)〉, 〈대종사(大宗師)〉편이 장자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존하는 《장자》 33편 중, 내편 7편이 장자의 저술이며 나머지는 문하생들이 지은 것이라 한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유한하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며, 유한으로 무한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의 언어, 인식 등은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린 결론이 모든 것에 대해 동등하게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장자의 사상은 다문화주의 및 가치 체계에 대한 상대주의의 선구로 볼 수 있다. 그의 다원주의는, 삶이 좋고 죽음이 나쁘다는 전제처럼 실용적 명제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나아간다. 외편 〈지락(至樂)〉편의 한 우화에서 장자는 노상에서 죽은 해골을 보고 슬퍼하지만, 정작 해골은 ‘죽음이 나쁘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박한다. 〈제물론〉편의 다른 글에서 화자는 미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지적한다.

정현<불이성 한주>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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