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만해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 재조명
법 장

1914년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스님이 우국지사 매천 황현을 추모하며 쓴 시 ‘매천선생’“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1914년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스님이 우국지사 매천 황현을 추모하며 쓴 시 ‘매천선생’“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I. 서론

II. 본론

1.조선불교 유신론과 만해의 개혁사상

2.승니의 결혼문제

III. 결론

 

I. 서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여러 분야에서 재조명을 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민족독립운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들라면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1 혁명(三一革命) 또는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황제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3·1 운동은 현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하는 것은 주도인물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한 만해 한용운 스님과 백용성스님이다. 주제와 관련하여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만해 한용운스님이다.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승니의 취처론을 주도하여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만해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불교개혁을 주창하였다. 본 소론은 《조선불교유신론》에 나타난 ‘승니의 결혼문제’에 대한 소견을 논하고자 한다.

II. 본론

1. 조선불교 유신론과 만해의 개혁사상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1913년에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저술 간행한 불교 논서이다.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의한 배척과 탄압 속에서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산중으로 도피하여 약화된 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근대적인 불교 개혁론을 주장한 역저(力著)이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용운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술했다.

불교의 성질로서 불교가 진보적으로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불교의 주의로서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를 강조하고 있다. 구습파괴(舊習破壞)에 의한 혁명적 개혁으로 불교 유신을 정의하고 있으며, 그 방안으로 아래의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승려 교육제의 개혁, 염불당(念佛堂)의 폐지, 포교방법의 근대화, 대중적, 모험적, 구세적, 경쟁적, 사상의 고취. 전근대적 불가소회(佛家塑繪)의 철폐, 각종 의식의 개혁, 승려 자신의 노동력에 의한 자활(自活)과 그것에 의한 인권회복, 승려 금혼제(禁婚制)의 철폐,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제 채택, 유신론자의 대동단결과 사원통할제의 개혁이다. 본론으로서 주목하고자하는 것은 승려금혼제의 철폐이다. 만해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의 장래와 승니의 결혼문제’를 거론하면서 불교의 부흥과 관련하여 주장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생활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승려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이 편견이라 주장하고,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의 입장을 이해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용운 스님의 승니의 결혼관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2. 승니의 결혼문제

승니의 결혼문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사실, 태고종을 비롯해서 군소 종단에서는 승려가 결혼해서 생활을 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불문율처럼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과감하게 공론화해서 담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태고종이나 군소 종단에서는 현실적으로 승려가 결혼해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고승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과감하게 주장했다는 점에 우리는 고무되어야 하고, 태고종의 현실에서 만해스님의 주장을 이론적 무기로 삼아서 더욱 발전시키고 공론화해서 그분의 진정한 취지를 파악하여 제대로 이해하고 선양할 필요까지도 있다고 본다.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 ‘불교의 장래와 승니의 결혼문제’에 대한 논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나에게 「불교는 무슨 방법으로 장차 부흥시킬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반드시 이렇 게 말하겠다. 「승려의 결혼 금지를 푸는 것도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그러면 아마 나를 비난할 것이다. 「당신은 왜 이런 몰상식한 말을 해서 부처님의 계율(戒律)을 더럽히는가. 《범망경(梵網經)》)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 람은 스스로 음행(淫行)을 한다든지, 남에게 음행을 시킨다든지, 내지는 모든 여성을 고의 로 음행하지 못한다』 하셨고, 사분율(四分律)에 이르기를 『부정행(不淨行(부정행)) 범하기 를 축생(畜生(축생))과 같이 했다 하더라도 이는 비구(比丘)의 바라이 불공주(不共住)에 해 당한다』고 하셨다. 또 수계의(受戒儀) 중 사미십계(沙彌十戒)의 세째 것이 음행하지 말라 는 것이며, 비구의 사바라이계(四波羅夷戒)의 첫째가 부정행계(不淨行戒)다. 그리고 이 밖 에도 음행을 금지한 계(戒)가 여러 책에 나오는 것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임을 볼 때, 불가(佛家)에서 결혼을 금지함이 과연 얼마나 중복되는 것이랴. 불교를 위하는 사람으 로서 어찌 방자히 결혼하여 계율을 손상하겠는가. 결혼함으로써 불교를 중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결혼함으로써 불교를 망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논에서는 불교의 계율관에 의한 음행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승니라면 독신 청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이런 불교의 전통 계율관에 입각해서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일단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만해 스님 스스로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펴고 있다.

“나는 말하겠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화엄경(華嚴經)》의 사사무 애(事事無碍)의 대승적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대저 고상•현허(玄虛)하고, 깊고도 끝없이 넓으며, 진실과 허망이 일정한 성품이 없고, 공과 죄가 본래 공(空)해서 어느 곳이 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고, 일 치고 용납하지 않음이 없는 불교의 진수(眞髓)가 어찌 자질구레한 계율 사이에 있겠는가. 불교를 계율에서 구하는 것은 참으로 용을 한 잔의 물 에서 낚고 호랑이를 개미집에서 찾는 태도라 하겠으니, 어찌 가능하랴. 과연 결혼이 불도 (佛道)를 성취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어찌해 과거칠불(過去七佛)이 어느 부처님이든 아들 없는 분이 없으시고, 무수한 보살이 대개 재가(在家)에서 나온 것일까. 다만 소승(小乘)의 근기(根機)가 천박해서 욕망으로 흘러 돌이키기 어려운 자들을 상대하셔야 했기에, 방편으 로 사소한 계율을 설정해 제한하신 데 불과하다.

무릇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實)한 듯한가 하면 허(虛)한 듯하기도 하고, 놓아 주는 듯한가 하면 뺏는 듯도 하고, 왕자(王者) 같은 반면 패자(霸者) 같기도 하고, 천지와 같은가 하면 터럭 끝 같기도 하여 형용할 수도 없고, 어느 일단(一端)을 가지고 논할 성질의 것도 아 니다.

그 미묘한 말씀과 지극한 뜻으로 병에 따라 약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연을 좇아 도 (道)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시는 것뿐이니, 조용한 마음으로 이치를 따라 먼저 종지(宗旨) 를 찾는다면 생각에 저절로 얻는 바가 있을 터이니, 멀고도 넓다고 할 것이다. 우물안 개 구리가 강호(江湖)의 크기를 잊는 바다의 이야기를 듣기나 했을 것이며, 가지에 보금자리 한 뱁새가 어떻게 하늘 높이 떠서 남명(南溟)으로 날아가는 뜻을 알랴. 원교(圓敎)는 율종 (律宗) 따위가 감히 바랄 바 아니니, 다만 가을달이 비치는 고요한 산과 봄 물결이 넘실 거리는 대해(大海)에 의미가 있다면 불법은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해스님은 승니의 결혼에 대해서 그 이론적 근거로서 《화엄경(華嚴經)》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대승적 진리를 인용하고 있다. “진실과 허망이 일정한 성품이 없고, 공과 죄가 본래 공(空)해서 어느 곳이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고, 일 치고 용납하지 않음이 없는 불교의 진수(眞髓)가 어찌 자질구레한 계율 사이에 있겠는가.”라고 일갈하고 있다. 만해스님은 더 나아가서 “불교를 계율에서 구하는 것은 참으로 용을 한 잔의 물에서 낚고 호랑이를 개미집에서 찾는 태도라 하겠으니, 어찌 가능하랴. 과연 결혼이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어찌해 과거칠불(過去七佛)이 어느 부처님이든 아들없는 분이 없으시고, 무수한 보살이 대개 재가(在家)에서 나온 것일까. 다만 소승(小乘)의 근기(根機)가 천박해서 욕망으로 흘러 돌이키기 어려운 자들을 상대하셔야 했기에, 방편으로 사소한 계율을 설정해 제한하신 데 불과하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승과 대승에 대한 교리적 철학적 논변과 사변이 필요하고 계율도 하나의 방편 정도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관점의 문제가 우선해야 한다고 본다. 만해스님은 매우 설득력 있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과거의 부처님들도 모두 자식을 두고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본종에서는 만해스님의 이런 이론에 대해서 보다 더 연구하고 인식해서 이론적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학습이 필요하다. 누가 승려기 왜 결혼하느냐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득을 시키고 방어할 줄 아는 논리개발이 필요하고 교리적 역사적 논설로써 정당화 하는 이론체계가 먼저 서야 한다고 본다.

만해스님은 중추원에 헌의서를 제출하기도 하는데, 중추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0년 9월 30일자로 공포되고, 10월 1일자로 시행된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朝鮮總督府中樞院官制)」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1910년 12월 12일에는 「중추원의사규칙(中樞院議事規則)」이 제정되었고, 1918년 1월 19일에는 「중추원사무분장규정(中樞院事務分掌規程)」이 제정, 공포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단 한 번의 소집명령조차 없었다. 친일파들에게 나눠준 유일한 정치적 관직인 이 중추원의 부의장에는 김윤식(훈2등 자작, 이후 3·1운동 가담으로 작위 박탈), 고문에는 이완용(훈1등 백작), 박제순(훈1등 자작), 고영희(훈1등 자작), 조중응(훈1등 자작), 이지용(훈1등 백작), 권중현(훈1등 자작), 이하영(훈1등 자작), 이근택(훈1등 자작), 송병준(훈1등 자작), 임선준(훈1등 자작), 이재곤(훈1등 자작), 이근상(훈2등 남작), 이용직(자작, 이후 3·1운동 가담으로 작위 박탈), 조희연(남작, 사후에 반납)이 임명되었다.[1] 1939년에는 박상준이 참의에 임명되었다.

만해스님은 중추원 헌의서에

“엎드려 생각건대, 인간계의 일에 있어서는 변화보다 좋은 것이 없고, 변화하지 않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는가 합니다. 한번 정해진 채 조금도 변할 줄을 모른다면,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오늘에 앉아 다시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천지는 잘 변 화합니다. 그러기에 만물이 거기에서 생겨납니다. 만물도 잘 변화합니다. 그러기에 낳 고 낳아 다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같이 낳고 낳아 다함이 없고 잘 변화를 계속 하면 그 진화(進化)의 묘(妙)가 날로 번창해 가는 것이어서, 비록 그 수효를 모두 세 고자 하나 가장 뛰어난 계산가(計算家)가 백년의 수명을 가지고 센다 해도 그 임무를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무릇 변화와 불변의 비례가 이와 같기에 온 세상 사람들은 변 화를 존귀하게 여깁니다. 변화 중에는 천년이나 내려온 생각을 바꾸는 것도 있고, 일 세(一世)의 논의를 바꾸는 것도 있고, 며칠•몇 달의 것을 바꾸는 것도 있어서, 그 변 화 기간의 장단(長短)에는 차이가 있기는 해도 진화의 경지로 달리어 들어가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야말로 진화의 불이법문(不二法門 )이라 하겠으니, 변화하지 않는대서야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먼저 전제한 다음,

“더욱 불교는 크고 원만한 가르침이어서 무슨 일이나 금함이 없는 터입니다. 다만 근기(根機)가 천박한 중생들을 고려한 까닭에 방편으로 계율을 정한 것뿐이건만, 저 사람들이 이를 몰라 그릇 금언(禁言)인 양 여겨서 넋을 잃은 나머지 다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아, 과거에 있어서 불교가 중생계(衆生界)에 영향을 끼 침이 요원한 터인데, 수천 년 동안 승려 중에서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발언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슬픈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만해스님은 결정적인 주장을 펴면서 승니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

 

“만약 불교로 하여금 천하에서 종적을 감추게 해도 한이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승려들이 결혼해 자식을 낳음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해서 종교 경쟁의 진영에 불교의 기치를 세우는 것이 또한 교세(敎勢)를 보존하는 대계가 아 니겠습니까. 결혼 금지가 한번 바뀌는 날은, 공(公)으로는 식민과 사적(私的)으로는 교세 보존에 적당하여 마땅치 않음이 없겠는데 무엇을 꺼려서 고치지 않는 것입니 까. 이런 금계(禁戒)는 처음부터 법률과 관계없는 터이라 스스로 금하든 스스로 해 제하든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천 년의 적습(積習)이라 일조에 고치기 어려 워서, 이의(異議)가 백출(百出)하고 서로 의구(疑懼)하는 까닭에, 뜻이 있으면서도 달성하지 못함이 또한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해는 지고 길은 멀어 조금도 더 늦출 수 없는 까닭에 감히 어리석은 말씀을 드리는 바이니, 다행히 잘 생각해 주셨 으면 합니다. 만약 저의 이런 말이 진화하는 오늘에 있어서 아무 보탬이 안 된다면 물론 제 의견을 용납할 것이 아니겠으나, 조금이라도 채택할 것이 있다면 다행히 각의(閣議)에 제출하고 천하에 법령으로 공포하여, 승니의 결혼 여부를 자유에 맡 겨 진화에 장애가 없게 하여 주신다면 공사(公私) 간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라고 중추원 의장 김윤식에게 건의하고 있다. 만해스님은 통감부에도 건백서를 제출하여 승려의 결혼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통감부(統監府)는 일본 제국이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한성부에 설치했던 정치와 군사 관련 업무를 보는 관청이다. 형태는 대한제국 정부에 자문 또는 섭정을 하는 형식이었다.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라고도 한다. 조선총독부의 모체가 되었다.

“ 엎드려 생각건대, 승려의 결혼을 부처님의 계율(戒律)이라 하여 금한 것이 그 유 래가 오래 되었으나, 그것이 백가지 법도를 유신(維新)하는 오늘의 현실에 적합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승려로 하여금 한번 결혼을 금지한 채 풀지 않게 한다면, 정치의 식민(植民)과 도덕의 생리와 종교의 포교에 있어서 백해무익(百害無益)할 터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런 조처도 없고, 승려들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만 가서 환속 (還俗)하는 자가 날로 많아지고, 전도(傳道)가 날로 위축되어 가고 있으니, 속히 금혼을 풀어 교세(敎勢)를 보존하는 것과 어느 쪽이 낫겠읍니까. 많은 수효의 승 려로 하여금 태도를 바꾸어 결혼해 애를 낳게 한다면, 그것이 정치•도덕•종교계 에 영향 줌이, 생각건대 많지 않겠읍니까. 이런 이유로 하여 이에 감히 소견을 개진하오니, 깊이 살피신 다음에 승려의 결혼 금지 해제의 사실을 특별히 부령 (府令)으로 반포하시어서, 대번에 천 년의 누습을 타파하여 세상에 드문 치적(治 績)을 이루게 되시기 바랍니다. 정치는 혁신함이 제일입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듯하면서도 사실은 중대한 일이니, 다행히도 빨리 조처하셨으면 합니다. 간곡히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설득형 건의를 하고 있다.

III. 결론

이상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주장하신 ‘승니의 결혼문제’에 대하여 만해스님의 주장을 소개하고 중추원과 통감부에 제출한 헌의와 건백서 일부 내용을 소개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미 1세기 전에 이런 승니의 결혼문제에 대해서 과감하게 교리적 철학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취처를 주장하고 있는 데에도 머뭇거리면서 두리번거리는 우리들의 못난 자화상이다. 내부에서 종권이나 이권을 가지고 아웅다웅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부터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논리적으로 이념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해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음성적이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로 어물쩍 넘어가는 소극적인 자세보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대승보살도를 구현하고자 함이다.

법장(한국불교신문 편집국장)
법장(한국불교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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