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태 박사(삼국유사 연구원장)

불교에서 산신신앙 수용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거주하는 사람에 따라 건물의 이름이 정해졌다. 건물은 위로부터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루(樓)-정(亭)의 8품계로 나뉘었다. 전(殿)은 왕과 왕비의 거처 및 집무실이나 부처님이나 공자을 모시는곳으로 근정전,강령전,교태전,대웅전,대성전이다. 당(堂)은 왕의 자녀 큰스님,유생들의 공부방으로 자선당,명륜당이 있다. 합(閤)은 왕족 중 서열이 높은 사람 또는 전,당의 부속건물을 말하며 각(閣)은 왕실 가족,정승,판서 집무실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까지 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제(齊)는 고급관리,헌(軒)은 공무용 건물,루(樓)는 휴식용 2층 건물, 정(亭)은 휴식용 1층 건물에 붙인 이름이다. 왕을 전하라고 한 이유는 왕을 뵐 때 왕의 거처인 전의 아래에서 뵙기를 청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민긴신앙의 전각인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 각(閣)은 4번째 해당된다. 결국 불교가 민간신앙을 포용하면서 그 격을 상당히 낮게 평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대다수 전각들은 대웅전이라고 하는 불교의 주불인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곳을 지나가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불교와 친숙하게 하는 포교방법을 동원했다. 민간신앙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신과 가까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에 건축한 것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부처님보다 더 높게 받들고 있다는 고마움으로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속 깊은 배려심은 한국불교가 민족종교화 될 수 있었다고 본다.

 

대웅전에 대한 또 다른 주장

한국불교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대웅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불이 사마에게 항복을 받아낸 위대한 영웅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마란 곧 악마이며 악귀, 악신의 총칭이다. 대웅전은 위대한 사람, 영웅을 모신 웅장한 건물이며 사찰 경내에서 제일 중심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좌우에 협시불을 세우는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세우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에는 삼세불과 삼신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과거불인 연등불 또는 가라보살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좌우에 협시하여, 각 협시불 좌우에 석가의 10대 제장 중 가섭과 아난존자를 세우기도 한다.

일부 민족종교, 상고사 연구자들은 원래 대웅전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전각이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삼신으로 모셨던 환인, 환웅, 단군이 내 몰리면서 그곳에 불교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각이라고 부르는 전각을 예로들고 있다. 여기서 삼성은 환인, 환웅, 단군을 말한다.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준 중국은 물론 대만 그리고 한자문화권인 베트남에도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곳을 대웅전이라 표기하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1524년 포르투갈 선교사 알렉산드로 드로데 신부(프랑스 아비룡 1591-1660)가 창안한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찰은 고래의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같은 불교문화권이면서도 일본의 경우 대부분 본당아라고 한다. 그 외 금당(金堂)이라고 하거나 불전(佛殿)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대웅은 굳이 불교의 용어라고 하기 이전 인도에서 부처님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Mahavira,B.C599-527)의 이름의 뜻은 ‘위대한 영웅’으로 한역(漢譯)은 대웅(大雄)이다.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웅전이 우리 고유 신앙에서 유래되었다면 중국,대만,베트남,한국은 동일 문화권으로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민족이 되어야 한다.

민간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산신은 산신령․신령 등으로 불리고 때로 노인으로 관념되거나 아니면 호랑이로 관념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는 단순히 산신의 말(馬)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산신령이 노인, 그것도 흰 수염의 선중도인의 노인으로 관념될 때, 산신숭배는 신선사상과 같은 유대를 가지게 된다.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산신은 서낭신과 겹쳐서 동신, 곧 마을신으로 섬겨지면서 동신제․서낭굿․별신굿․당산굿 등의 주신이 되어 민간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부상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동신제가 아예 산신제로 관념될 정도이다. 산신각 신앙이라는 형태로 불교에 편입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산신신앙이 토착화하는데 에는 타종교에 비해 지극히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다원주의적 포용성을 가지는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마을마다 산이 있고 산마다 산신이 있어 산신을 숭배해 왔는데 불교는 재래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 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부여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풍수적인 이유로 현재와 같은 위치에 건축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한국의 가람은 대개 명산 자리에 있다. 사원에서 명당의 기운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중심에 모시는 주불을 모시는 법당이나 대웅전이 있고 여타의 전각들이 전후좌우로 들어서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산신각(山神閣)은 가람에서 한참 떨어진 깊은 산기슭이나 언덕에 자리하여 산이 지닌 정기(精氣)를 제일 먼저 받는다.

 

산신은 단군이후 신앙된 우리 고유한 믿음

민간신앙과 도교, 불교가 결합된 신앙형태에서는 칠성신이 환인천왕이요 산신이 단군천왕이며 독성은 환웅천왕으로 해석하여 도교적 칠성과 무교적 산신과 불교적 독성을 한 곳에 모심으로써 민간신앙, 불교, 도교 삼교혼합이라는 한국적 이상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또 하나는 외래적인 도교와 불교의 신명을 채택하여 칠성이니 독성이니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재래의 토착적인 삼신신앙을 그대로 사찰 안에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삼성이 기도의 대상이라는 것과 또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토착적 삼신신앙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칠성에게는 연명수복을 빌고, 산신에게는 부귀재복을 빌며, 독성에게는 복전속성을 비는 수용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맞춤형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한 건물에 불교, 도교, 민간신앙의 신상을 함께 모셔놓는 다는 것은 자신들의 소원을 한 곳에 몰아서 성취하려는 복합신앙 형태라 볼 수 있으며 “빨라”,“빨리”를 사용하는 우리 민족성이 짧은 기간 안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한민족의 속성과 잘 맞물려 복합적인 신앙공간으로 변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산신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사찰이 있는 바로 그 산의 산신을 모신다. 산신은 호랑이로 화신하기도 하는데, 수행자가 일정한 수행 단계에 오르면 산신이 호랑이로 변신해 수행자를 수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경우, 때에 따라 산세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때가 산신의 조화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산신신앙이 언제부터 불교사찰 안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흔히는 불교가 억압되던 조선 초에 사찰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을 유치하는 한 방편으로 세운 것이라 하고, 일대종교혼합기이었던 고려시대의 현상이 오늘까지 잔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재래의 영지신앙이 불교와 습합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앙형태로 형성되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와 같이 산신신앙이 불교에 도입된 시기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대체로 조선조의 극심한 종교탄압에 기인했다는 것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혼합시기와 관련 17세기경에 산신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을까? 조선시대 말에, 지방의 거의 모든 사찰들은 더 이상 소작료만으로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시주를 받거나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의식이나 기도회를 주관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반 신도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출 수 있는 의식들을 제공하게 되었다. 불교적인 의식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산신이나 칠성, 용왕 등 신중탱화 속의 신들을 다시 개별화시키게 되었다.

또 다른 주장으로 종교혼합기라 할 고려시대에 일어난 현상이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정태 박사(삼국유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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