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 100주년에 생각하는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으로 현재는 종로구 인사동.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으로 현재는 종로구 인사동에 표지석만 남아 있음.
만해 한용운스님이 자주 머물렀던 선학원.
만해 한용운스님이 자주 머물렀던 선학원.
만해스님이 가끔 설법하러 들렀던 불이성 법륜사
만해스님이 가끔 설법하러 들렀던 불이성 법륜사
충남 홍성에 소재한 만해선사의 생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던 내설악 백담사 일주문. 

 

만해 한용운(1879.8.29.~1944.6.29.)스님은 불교 승려로서만이 아니라, 민족의 선각자로서도 너무나 유명하신 분이다. 독립운동가요 혁명가요 시인이면서도 불교의 대선사였다. 1919년 3.1기미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33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리된 자료에 의하여 3.1 독립선언서를 소개해보면;

3.1 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이 계획된 당초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일본정부에 대하여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발의되었으나,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강력한 독립의 의지와 그 당위성을 내외에 선포할 독립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최린(崔麟)의 주장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해 2월 초, 최린·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은 협의를 했고, 선언서의 초안은 최남선이 작성하였고, 만해스님은 공약 3장을 첨가하였다.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는 독립선언서 작성의 대원칙을 세웠는데, 이는 ① 평화적이고 온건하며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 ②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③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정신을 바탕으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입각한 운동을 강조한다는 등이다.

최남선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광문회(光文會) 임규(林圭)의 일본인 부인의 안방에서 약 3주일 만에 이를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하였고, 최린은 손병희 등의 동의를 얻어 2월 27일까지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끝마쳤다. 선언서 뒷부분에 첨가된 공약 삼장(公約三章)은 한용운(韓龍雲)이 따로 작성한 것으로 전한다. 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에 의해 천도교(天道敎)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넘겨져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10시까지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선언서는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천도교당으로 옮겨지고 28일 아침부터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선포 및 배포 되었다.

한편,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아침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탁상에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열람하게 하였으며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날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탑동(파고다) 공원에서는 각급 학교 학생 ·시민 약 5,000명이 모여 정재용(鄭在鎔)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3·1독립선언서 [三一獨立宣言書] (두산백과)>

 

이상의 자료에서 보듯이 만해 한용운 스님은 3.1독립선언서 작성과 낭독 그리고 만세운동을 펼친 것에서도 스님의 활약은 적극적이었고 앞장서서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만해스님은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등, 그야말로 스님이 겪었던 고초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해스님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선각자로서 앞장섰을 뿐 아니라, 불교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다.

 

《조선불교유신론》

1910년 만해스님은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여 불교계의 혁신을 주장했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아울러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자, 선생은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만해스님은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1914년 4월에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고, 《불교》 편집을 주관했다. 그럼으로써 만해스님이 추구하던 불교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던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게 된 배경은 일본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만해스님이 1909년 집필을 시작하여 1910년 백담사에서 탈고한 후 1913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 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범어사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 하였고, 해인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만해스님은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교학교인 중앙학림 학생인 정병헌, 오택언, 전규현, 신상환 등에게 건네주면서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선생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될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게 피체되었고,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인답게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민족대표들 가운데는 불안과 절망에 빠져 소란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그들에게 호통을 쳐서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었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해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은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대로 유용하며, 한국불교계에 적용되어야할 개혁 지침서라고 할 것이다. 특히 태고종은 만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많은 암시를 받아야 하며 변화와 개혁의 정신적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본종에서 발간하는 월간 <불교>에 연재되고 있다. 3.1독립선언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은 태고종에도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만해스님의 불교개혁론을 재조명해서 종단이 새롭게 변화하고 도약하는 정신적 동기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현<불이성 법륜사 한주>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