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륜화상열반 40주기 추모논단

한국불교태고종의 창종 주이며 불이성법륜사의 중창건주인 진종대륜 대종사.
한국불교태고종의 창종 주이며 불이성법륜사의
중창건주인 진종대륜 대종사.

1.시작하는 말
2.대중포교 원력과 실천
3.종단소임과 활동
4.나가는 말

1. 시작하는 말

대륜 대종사님의 열반 40주기를 맞아서 대륜화상의 ‘대중 포교 원력과 태고종’이라는 제목으로 소론을 구성한다. 대륜화상의 대중 포교 원력과 활동, 업적은 아직까지 정밀하게 체계적으로 정리, 평가되지 않았다고 본다. 부분적인 단편적인 소개 글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대륜화상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종합적인 정리된 논문은 아직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일부의 소개 글들은 있지만, 한국불교 근세백년사에서 볼 때,  역사의 현장에서 일정부분의 역할과 활동을 했던 부분이 있음에도 제대로 된 자리매김과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조명 받지 못한 이유로서 두 가지 견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대륜문도와 태고종의 관심과 연구풍토조성 미비 둘째는 범불교적인 영역의 연구자들의 편향된 시각과 일방적 고승평가 경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사단법인 대륜.덕암불교문화연구원’이 설립되어 있지만, 연구원으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문도들의 관심과 후원, 연구인력 확보에 의한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정리에 따른 연구논문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사정은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태고종에서도 창종 주로서의 대륜스님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고 열반다례재마저 대륜문도 중심으로 봉행해 왔던 것을, 제26대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이 취임하면서 종단차원에서 역대 종정스님들의 추모다례를 봉행하기로 종무회의에서 결정하여, 2018년도부터 시행한 것은 매우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종단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대륜화상에 대한 연구가 체게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국불교 근세 100년사에서 관계연구자들의 편향된 시각과 일방적 고승평가는 객관성을 잃고 있으며 1950년대의 불교내분에 의한 사찰분규로 인한 정치적 개입으로 승가에 엄청난 이동현상이 발생했고, 사찰구성원의 물갈이에 의한 전래사찰의 사자상승 전통의 붕괴로 인한 혼란에 따른 결과이겠지만, 법륜사측 고승들이 객관적 평가를 받는데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자 한다. 다른 연구자들의 기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대륜 문도회와 태고종에서 관심과 후원, 연구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불이성 법륜사, 총무원 청사 전승관에 걸려 있는 (사) 대륜.덕암불교문화연구원 현판.
불이성 법륜사, 총무원 청사 전승관에 걸려 있는 (사) 대륜.덕암불교문화연구원 현판.

2.대중포교 원력과 실천

대륜 화상은 1884년 강원도 간성에서 출생했으며, 1898년인 16세시에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했다. 10여 년 간 금강산 유점사를 비롯한 금강산 일대의 선방에서 교학과 안거를 마치고, 1908년 경, 상경(서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엔 각황사(현 조계사) 감원으로 취임하여 6년간 근속하였고, 1915년 34세 시에는 평양으로 옮겨서 유점사 포교당을 개설했으며 일본 불교를 견학하고 조선각지를 만행하기도 했다. 이후 1929년 48세 때, 현재의 불이성 법륜사에 전법도량을 개설했는데, 그 때는 안변 석왕사 포교당이었다. 당시 6천원에 포교당을 인수해서 불이성 법륜사로 개칭하여 도심 포교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이성 법륜사는 올해로써 90년의 역사가 쌓이는 포교공간이다.
대륜 화상은 그 무렵에 이미 불교부인자은방생회를 조직하고 초대 포교사로 가야산 해인사 출신인 보담강백(寶潭講伯)을 초대해 포교사 겸 화엄산림(華嚴山林)의 회주(會主)로 모시고 법회를 개설했다. 후에 덕암노사께서 《화엄경》을 역경하여 출판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대륜노사의 뜻을 받들어 역경불사를 한 것이다. 당대의 대 학승들인 포명강백(抱明講伯)과 고경(古鏡) 스님 등을 포교사로 영입하여 법회를 개최했는데, 그야말로 불이성 법륜사는 한국(조선)불교의 중심도량이었다. 1991년에 간행한 《太古宗  宗正 大輪 大宗師 法語集》에 의하면 대륜 화상은 대중포교활동을 하면서 수십 차례의 대중설법을 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그때마다 설법내용을 기록하여 《불교》 잡지에 게재했고, 이 <법어집>도 《불교》지에 게재되었던 자료들이다.
<법어집> 63쪽 ‘전법(傳法)의 자세’란 제목의 설법내용을 간추려 소개해보자.
“대중 여러분!
올 여름, 구순동안 정진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동안 공부가 모두들 일취월장하여 화두의 의미가 계합된 이들도 있을 것이고, 미진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공부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바세계를 다할 때까지 하는 것이니 평소에도 모두 열심이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찰의 문 밖에 나서면 행동 하나하나가, 말 한하나가 주생들에게는 법문이 될 터인즉 몸가짐과 언행에 조심하여 부처님의 법을 가리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이 정법선포를 위하여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불자들이여! 나는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고, 그대들도 또한 인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불자들이여, 이때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생각하고 그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모든 나라를 두루 찾아가야 할 것이다. 한곳을 향하여 두 사람씩 같이 갈 필요는 없다. 불자들이여, 처음에도 선하게 중간에도 선하게 마지막에도 선하게 올바른 도리와 표현을 하여 법을 설 할지어다. 모든 것에 관하여 청정한 수행을 가르칠지어다. 조금의 청정치 못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바른 법을 듣지 못했으므로 해서 멸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은 법을 들으면 곧 믿고 받아들이리라. 불자들이여, 나 또한 법을 멀리 펴 전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우루벨라의 세다니 촌으로 떠나고자 하노라’
대중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중략“의 설법을 했는데, 아마도 공부를 마친 승려들에게 한 법문이었던 것 같다.

전승관을 짓기 전 불이성 법륜사의 모습.
전승관을 짓기 전 불이성 법륜사의 모습.

동 <법어집> 67 쪽에는 ‘보시행(布施行)에 대하여’라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불자 여러분, 현대는 날로 발전해 가는 물질문명에 의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웃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지조차도 관심이 없고, 오직 울타리 안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에만 신경 쓰기 급급합니다. ...중략.. 이 시대는 자비와 보시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보시인 것입니다. 그러면 보시란 무엇이겠습니까? 보시란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도 여러 가지의 베품이 있으니 그 종류를 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슷로 발심(發心)해서 하는 보시요, 둘째는 남이 구걸하기 때문에 하는 보시요, 셋째는 교도(敎導)하기 위하여 하는 보시이다. ...중략..”

이상에서 대륜화상의 포교 설법내용을 인용했는데, 하나는 승려들에게 주는 ‘전법포교의 사명과 책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불자들을 상대로 한 내용이다. 대륜화상의 대중포교 원력과 실천을 엿볼 수 있는 의지가 담긴 내용이다.     
       
 3. 종단소임과 활동           

대륜화상은 불이성 법륜사를 중심으로 일찍이 대중포교에 나섰고, 그 원력과 실천의지는 입적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륜 화상에 대한 평가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 불교분규(법난)가 발생하면서 불이성 법륜사와 대륜 노사의 행적과 활동은 ‘불교정화’란 프레임에 의한 ’대처 측‘이란 이미지만 남겨진 결과가 되었는데, 이제 대륜 법손들은 불이성 법륜사와 대륜 화상의 근 현대 불교사적 공간에서의 위상과 지위를 찾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대륜대종사 열반 39주기 다례재에서 편백운 총무원장 스님은 추모사에서 다음과 같은 뼈 있는 지적을 했다. “대종사님께서는 일찍이 부종수교(扶宗樹敎)와 전법도생(傳法度生)의 대원력을 세우시고, 도심포교를 위하여 당시 안변 석왕사 포교당을 인수하시어 금강산 유점사 포교당인 불이성 법륜사로 개칭하여 전법도량을 개설, 대중불교 현대불교 생활불교의 건설을 위하여 보살도를 제창하면서 원적에 드실 때까지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교화에 앞장 서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환부역조(換父逆祖)의 무리들이 종조(宗祖)를 바꾸려하자, 고래전통교단(古來傳統敎團)을 유지.계승하려는 결단을 내려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봉안하고 그 원융정신을 견지함으로써 태고종의 법당(法幢)으로 거양(擧揚)하신 사조부종(嗣祖附宗)의 위업은 천추만대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라고 의미심장한 추모사를 한 바 있다.

보살계 수계법회에서의 대륜스님(사진 상단 좌석 오른쪽에서 첫 번째).
보살계 수계법회에서의 대륜스님(사진 상단 좌석 오른쪽에서 첫 번째).

대륜 대종사와 태고종은 불이의 관계이다.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했기 때문이다. 태고종 창종의 배경과 과정을 여기서 논하려면 한이 없다. 창종의 변을 소개해 보자. 1971년 11월 8일에 태고종 제2회 중앙종회에서 박대륜(朴大輪) 종정은 교시(敎示)를 통해,
“오직 우리 宗祖 太古普愚國師의 門徒만으로 今日까지 계승한 것이니 우리는 韓國佛敎의 嫡孫(적손)임을 矜持(긍지)할 뿐만 아니라 敎團運營에 重大한 任務感(임무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라고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이 짧은 문장에 태고종의 창종 종지와 배경, 정체성이 다 들어 있으며 교단운영에 대한 의무감까지 잘 나타나 있다. 망국의 설움에서 벗어나자마자 또 교단분열이라는 자체내분에 휩싸이게 됐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외부의 강한 권력의 입김이 작용한 탓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대륜 대종사는 본의 아니게 한국불교의 법통을 지키고 수호하는데 선봉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적 시련에 부닥치게 된다. 불이성 법륜사는 자연스럽게 그 중심도량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고종 창종이라는 카드를 들 수밖에 없었음은 시대적 책무요 당위적 혜검(慧劍)이었다. 종단의 실무는 덕암 대종사께서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안덕암(흥덕)) 총무원장도 연술을 통하여 “太古宗의 특성은 보살승단(菩薩僧團)”임을 강조하는 연술을 발표했다.

대륜화상은 태고종 창종 이전인 1968년 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분규수습을 위하여 박대통령에게 드린 건의서’란 것이 있다.  박대륜 총무원장스님은  6개항을 건의한다. 첫째항을 소개하면, “ 1. 흔히 대처승단(帶妻僧團)이라 하면 결혼한 승려들의 집단, 비구집단(比丘集團)이라고 하면 처자가 없는 자들의 집단으로 알려왔으나 대처승단에 다수의 독신자가 있는 반면, 비구집단에도 처자 있는 자가 불소합니다. 지금 불교계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비구파는 치의(緇衣)로 위장된 기만에 능한 소승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시작해서 6개항에 걸쳐 당시의 교계 사정을 알리면서 4개 항의 수습방안을 건의하고 있다.
4개항의 건의는 (1) 신교자유원칙의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불교재산관리법을 폐기하도록 하여 줄 것. (2) 불교문화재보호에 관한 사정은 현행 문화재 보호법의 보완으로 조치하여 줄 것. (3) 실효 없는 통합종단제의 정부시책은 유해무익함으로 이를 철회하고 각종파의 독자적인 신조와 수핸관에 따라서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보호 육성하여 줄 것. (4) 불교단체의 단합이 필요하다면 따로 연합체 구성을 위하여 협조하여 줄 것.“이라고 건의하고 있다. <1968년 12월 15일자>
이런 건의를 했지만, 정부에서는 불교조계종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70년 태고종이라는 간판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대륜화상은 태고종 창종 이전부터 불교조계종 시절부터 이미 총무원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건의는 매우 타당성이 있고, 불교분규를 해결하는 데에도 해법이 되지만, 당시로서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유추해보면 정당한 건의이고 분규 해결의 묘책이 될 수 있었음에도 당시 정권에서는 외면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건의는 평가를 받아야 하고 태고종은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태고종사를 모르는 다수의 종도들에게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작업을 대륜.덕암불교문화연구원과 종단이 공동 작업을 해야 할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4.나가는 말 

대륜스님이 16세때 출가했던 금강산 유점사의 예전 모습. 6 ·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현재는 터와 석탑만 남아 있다
대륜스님이 16세때 출가했던 금강산 유점사의 예전 모습. 6 ·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현재는 터와 석탑만 남아 있다

이제 대륜 대종사에 대한 연구는 문도회와 종단이 공동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단편적으로 대륜 대종사에 대한 전기적 연구는 진행되어 왔지만 한국불교 근세 백년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한다고 본다. 대륜화상의 교단사적 범주에서의 연구라든지 금강산 불교에서의 위상은 전연 연구가 없다고 해야 하겠다. 다만 불교분규 시기에 등장한 대륜 대종사의 활동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신문지상을 통한 보도에 대한 자료 정도이고, 태고종 창종 시기에 종정으로서의 공식적인 ‘종정교시’에 나타난 자료 등이다.
앞으로 불이성 법륜사는 물론이지만 ‘대륜·덕암 불교문화연구원’에서의 연구 진행도 체계적으로 예산을 세워서 진척되어야 할 뿐더러 종단 차원에서 대륜대종사를 비롯한 역대 종정에 대
한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 현대 법륜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승들에 대한 연구 또한 당연히 이뤄져야 하며 태고종 역대 총무원장이나 종회의장 등 현대 태고종
지도급 스님들에 대한 연구도 부수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원응<주필. 동방불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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