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점사강원 혜화전문 일본 유학까지, 신구학문 겸비

일제강점기 금강산 유점사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남허 스님은 앞 줄 맨 왼쪽.
일제강점기 금강산 유점사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남허 스님은 앞 줄 맨 왼쪽.

남허스님은 1917년생이다. 속명은 이남채(李南采).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이희순(해월화상)을 은사로 득도하고, 계사는 당대 율사로 이름이 높은 김완해 화상이다. 유점사에 18하안거를 성만했다. 거의 20여년을 유점사에서 보냈다. 유점사 강원에서 사교과를, 서울 안암동 대원암에서 박한영 대종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박한영 강백 문하에서 대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고마자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으면서 서울(경성)에 있는 유점사 포교당(불이성 법륜사) 포교사로 취임함과 동시에 1944년 조선불교 총본산(태고사, 현 조계사) 서무(총무)로 피임되어 사무를 총괄했다. 유점사에서 대덕법계를 품수 받고 금강산 유점사 교무겸 지방 순회 포교사로 취임했다. 해방이 되면서, 강원도 통천중학교장으로 취임했으며, 원산 고아원 부원장을 역임했고, 1952년에는 홍천 수타사 주지에 취임했으며, 수타사에 보육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불교조계종 총무원 교무국장, 1963년에는 불교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에 취임했고, 1970년 태고종 시대가 전개되면서 중앙종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남허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출신으로 엘리트 승려였다. 유점사는 금강산에 있는 대본산으로 금강산 일대와 철원 춘천 등지에 까지 말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61개의 말사를 거느린 대본산 사찰로서 한수 이북의 본산 사찰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성을 지닌 명승고찰이라고 하겠다. 남허스님은 유점사에서 전통강원 교육을 받고 서울에 와서 혜화전문학교를 다니고 도일하여 고마자와 대학에서 현대불교학을 연마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분이다.

귀국 후에는 대륜스님께서 인수한 불이성 법륜사에서 포교사로 취임하여, 근무했고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 서무 소임 까지 맡는다. 해방이 되면서는 통천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헌신하고 원산에 고아원까지 설립할 정도로 교육과 자선사업을 통한 포교활동에 매진한 것이다. 봉원사 총무원 시절에 통천중학교 출신 제자들이 남허 총무원장스님을 인사 차 찾아 온 것을 여러 차례 봤다.

남허대종사는 남북이 갈리면서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개인사가 있게 되는데,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을 생각해서인지 젊은 우리들을 매우 좋아 했다. 제자들을 지극히도 아끼는 분이었다. 총무원에서는 영우, 원응스님이 총애를 받았고, 법륜사에서는 종묵스님, 서울 3사에는 봉원사 용담,청련사 지홍, 지상스님이, 성주암 종연스님, 법진(보운)스님은 수원법흥사에서 인기가 있었고, 지방교구 종무원에서는 편백운 스님 등 이었다.

남허스님께서 법난이후 통합종단과정까지 법륜사측 대표 가운데 한 분으로 맹활약했던 것은 한국현대불교사, 불교 분규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태고종에서 발간한 《太古宗史》에서 이남채(남허)스님의 이름은 항상 등장한다. <계속>

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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