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의 체계를 세운 고승’

남허 대종사 종단장 팜플릿.
남허 대종사 종단장 팜플릿.

남허 대종사님이 입적하신지 어언 39주기가 된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이란 참으로 필설로써 형언해서 무엇 하리오! 스님께서 큰 포부를 갖고 총무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항상 말씀하신 것은 ‘태고종승(太古宗乘)’이었다. 스님께서는 이순의 나이였고, 필자는 혈기 방자했던 20대 청년이었다. ‘불교’지 편집국장이란 직함을 갖고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구상유취(口尙乳臭)한 풋내기였을 때다. 태고종승을 알아야 하고 선양해야 된다고 늘 상 말씀하셨는데, 운명적으로 내가 그 일을 이제 7순의 문턱에서 뼈저리게 느끼면서, 법륜사 일우에서 필을 들고 있다. 하도 할 말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서두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스님은 갑작스럽게 입적하셨기에 제자들에게는 물론 종도들에게도 충격이었다. 1974년 11월 25일에 종무총장(총무원장)으로 취임하셨다. 1차 임기를 마치시고, 1979년 5월 15일 총무원장으로 재 선출되어 재임을 시작하면서, 태고종을 혁신하려는 비전을 갖고 업무를 수행하던 중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1979년 8월 25일자로 사임하고 잠시 요양하던 중, 박정희대통령의 서거 등을 보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11월 2일 입적하시고, 11월 6일 태고종 종단장으로 영결식을 치루고 호명산 감로사에서 다비를 했다. 박영지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셨다.

종단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다비장으로 향하는 장면. 상좌 종묵(홍제)스님이 위패를 모시고 행진하고 있다.
종단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다비장으로 향하는 장면. 상좌 종묵(홍제)스님이 위패를 모시고 행진하고 있다.

영결식은 불이성 법륜사(현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에서 거행됐다. 영결식순은 개식(명종), 삼귀의례, 예불가, 추도묵념(육성녹음근청), 독경(반야심경), 약력보고, 영결사(박영지 총무원장), 법어(국묵당 종정), 조사(정두석 중앙종회의장, 전 동국대 총장), 분향, 사홍서원, 폐식 순으로 진행되고, 법구는 바로 호명산 감로사로 향했다. 박영지 총무원장스님은 영결사에서“종단의 지도자였던 남허스님 학덕을 겸비하시고 탁월한 경륜을 지니신 스님의 원만하신 모습과 온화로운 성해(聲咳)가 아직도 우리의 눈에 선하고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총무원 사무실이나 이 법륜사 법당에 오늘도 어디엔가 스님이 계신 것 만 같습니다.”라고 하셨다. 장문의 영결사를 여기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국묵담 종정 예하는 법어에서“ 교계의 탁덕(卓德) 종단의 거목이 넘어 졌도다. 국가원수 급서에 뒤이어 또다시 우리 태고종 6백만 종도의 지도자인 남허대화상이 세연이 다하여 63세의 속납으로 갑자기 사세열반(辭世涅槃)하다니 이무슨 변고인가 노납의 귀를 의심치 않을수 없다.”라고 하셨으며, 종정예하께서는 “지도자를 잃은 비통은 비록 크지마는 열반하신 대덕의 뜻을 받들어 종단이 화합 단결함으로써 법성수호와 불법홍포에 정진할진 저”라고 법어를 마무리 하고 계신다. 종회의장 정두석 스님은“ 법난기에는 늘 출중한 지모와 용기로서 대처했으며 종단행정에는 신심과 원력으로 미래를 대비한 혜안이 있었습니다.” 라고 가장 아쉬워 했다.

호명산 감로사 다비장.
호명산 감로사 다비장.
익일 아침 사리를 수습하고 있다.
익일 아침 사리를 수습하고 있다.

제자들은 통곡하면서 스님의 법구를 따라 감로사 다비장에서 밤을 세우면서 슬픔을 참아야 했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반 39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스승이 열반에 들자, 제법 되던 제자들도 어디론가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종단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있는 제자들인 편경호(片鏡湖, 편백운 총무원장)스님, 영우, 원묵, 용담, 보운, 지홍, 지상, 종연, 종묵, 원응 등이 종단을 지키고 있다. 수선제자는 운산 전 총무원장, 지성 원로의원 스님 등이다. <계속>

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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