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경

한국불교태고종 원로의원>

 

I. 시작하는 말

II. 태고보우원증국사의 생애와 사상

III. 태고종의 미래

IV. 나가는 말

 

I. 시작하는 말

태고종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내용이 길어진다. 사실,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불교계 사람들도 태고종은 잘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고종 창종 역사가 일천하고, ‘태고종’이란 개념에 대해서도 생소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고종도들은 태고종을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종도들마저 태고종의 정체성을 잘 모르고 있어서 같은 종도의 선배로서 유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연식이 들어갈수록 이 종단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후학들에게 태고종이란 정체성을 각성시키고 싶은 것이 최근의 화두다. 종단에서 실시하는 승니(僧尼) 연수 교육은 매우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이미 교육을 어느 정도 마쳤다고는 하지만, 연수란 지속적으로 닦아야할 수행과정이다. 연수프로그램 가운데는 과목이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일종의 태고종도의 필수과목은 태고보우원증국사(1301년 10월 23일(음력 9월 21일)~1383년 1월 27일(음력 1382년 12월 24일))의 사상과 태고종이다.

그러므로 태고보우원증국사의 생애를 알아야하고 그분의 사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태고종도라면 당연히 알아야 한다. 다음은 우리가 태고종도이기 때문에 태고종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다음 순서이다. 나는 여기서 태고종을 이해하고 태고종의 정체성을 정립해야함은 당연한 것이지만, 태고종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이 소론(小論)을 전개하고자 한다.

 

II. 태고보우원증국사의 생애와 사상

그러면 태고보우원증 국사에 대한 뜻도 풀어서 이해를 해 보자. 먼저 ‘태고보우 원증국사’란 명칭부터 하나하나 풀어가 보자. 태고(太古)는 호이다. 속가 성은 홍(洪)씨이다. 보우(普愚)는 법명이다. 보허(普虛)도 그의 다른 호이다. 태고스님은 홍주 사람이라고 했다. 홍주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지역의 옛 지명이다. 태고국사는 여기서 태어난 분이다.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씨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태고국사가 태어났다. 13세 때 까지 속가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3세(1313년)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 대사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으로 가서 수행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회암사는 어디이고, 광지 스님은 누구이며 가지산은 어디인가. 회암사나 광지 스님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더 연구하도록 하고 가지산을 잠깐 살펴보자.

가지산은 전국에 몇 군데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지산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와 장평면 병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510m이다.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처음 전한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보림사란 절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선종사찰이다. 그렇다면 태고스님이 가지산으로 갔다는 것은 보림사로 갔다는 의미다. 당시 가지산에 보림사란 큰 절이 있고, 총림으로서 수행자들이 많이 모여서 승가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지산 보림사로 갔다는 의미인 것이다. 고려시대 가지산 보림사에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이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 종단으로 말한다면 조계산 선암사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 종단에서는 그래도 대중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찰은 태고총림 선암사다. 물론 서울 3사나 비구니 강원 등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 종단에서는 태고총림 선암사를 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태고국사가 어릴 때 회암사로 입산해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득도 수게를 하고 초발심자경문과 치문 정도의 과목을 마치고 가지산 보림사란 총림으로 가서 경(經)과 선 공부를 한 것이다.

여기서 공부한 다음에, 25세(1325년, 충숙왕 재위 12년)에 승과고시에 응시하여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용문산 근처의 감로사에서 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제도(僧科制度)라는 것이 있었다. 고려 때 승려를 대상으로 한 과거제이다. 승과제도는 승려의 선발을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제도로서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때는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으로 불교가 위축되었지만, 승과제도가 어느 정도 실시되었었고, 시험도 엄격히 하였다. 나중에는 없어졌다가 조선시대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09~1565)스님에 의해서 다시 승과제도가 잠시 부활해서 서산. 사명대사가 출현하게 되었다.

다시 고려 시대 태고보우국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승과에 합격해서 승관(僧官)이 될 수 있었지만, 참선수행을 위해서 선 수행을 전문적으로 하려고 감로사란 선원으로 갔다는 의미다. 1346(충목왕 재위 2년)에는 삼각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지었고 원나라에 가서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귀국하여 공민왕의 청으로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를 보다 못해 소설산으로 돌아가서 은거했으며 신돈의 참해를 피하여 법주사(法住寺)에 은거하였다. 그 후 신돈이 죽은 후 우왕의 국사가 되었다. 이상은 태고국사의 간략한 행장이다.

태고종에서는 우리가 태고보우스님을 태고보우원증국사라고 호칭을 하는데, 여기서 원증(圓證)은 시호(諡號)다. 시호는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고승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인데, 대개 왕이 내리기도 하는데, 고려의 왕이 내린 시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우스님, 태고스님, 태고보우스님 등의 호칭을 하지만, ‘태고보우원증국사’라고 호칭해야한다. 또한 우리 태고종도들은 ‘태고종 종조 태고보우원증국사‘란 긴 호칭을 써야 사실상 옳은 호칭이다. 태고보우원증국사는 한국불교의 제(諸) 종파를 초월해서 ’한국불교종조‘이지만, 여기서 ’종조론‘을 길게 말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나 근세에 한국불교 종조는 태고스님이란 통칭에 이론이 없었으나, 법난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바뀌고 환부역조(換父逆祖)의 불효를 저질렀다. 하지만 정권과 결탁한 신흥불교세력의 행패는 종조도 마음대로 바꾸는 불경을 저질렀다.

이런 종조 문제도 후학 종도 여러분들이 연구하고 주장하고 밝혀 나가야할 과제이다. 내가 종단의 종승위원장을 역임했는데, 나는 일찍부터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했던 사람이다. 또 종회에서도 이런 종조문제를 연구하고 밝혀서 널리 알리는 일을 결의해야 하는데, 엉뚱한 데에 온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고려 말기에 고려는 원나라에 재침략을 받고 이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는 사회상의 불안에 따른 불교교단의 타락과 오랫동안 쌓여온 기복 불교(祈福 佛敎)의 폐단이 마침내 고려 사회에 배불의 싹을 마련하고 있었다. 한편 원나라의 쇠퇴는 공민왕에게 정치상 자주성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 복고 정치를 과감히 수행해 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은 이런 세상에 출현하여 임제종의 선풍(禪風)으로 불교를 일상 현실에 살리려고 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태고보우 국사는 구산선문의 통합을 시도하여 그 과제를 조선 대(代)에 넘겨주었다. 공민왕이 훗날 《청사(靑史)》에 요승으로 기록되는 신돈을 기용하여 실정한 탓에 배불의 기운이 비등하였고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음은 역사의 줄거리가 되었지만, 결국 불교도 고려와 운명을 함께하여 조선 전체가 관여하는 배불정책 탓에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탄압받아 쇠락하는 과정을 겪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태고보우의 법맥을 을 환암혼수의 법맥이 조선에 이어져서 오늘 우리 태고종에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태고보우원증국사의 사상을 일별해 보자. 태고보우 국사는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치선이라고 갈파한 구산을 통합하고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지양하고자 원융부(圓融府)를 건립하고 선사(禪師)의 품법으로 모든 불교를 총섭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태고보우는 일찍이 만법귀일(萬法歸一)·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친 바가 있었지만, 충목왕 2년에 중국에 다시 건너가, 임제(臨濟)의 제17대 법손(法孫) 석옥(石屋)에게서 법을 받고 충목왕 4년에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쓰면서 보림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민왕이 보우를 불러 법을 물었을 때 보우는 “왕도는 불교 신앙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권 38)에 기록되어 있다.

태고보우스님은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 나서, 용문산 상원암. 광주 성서(城西)의 감로사에서 고행 정진하였고, 1337년(충숙왕 복위 6) 송도(개성)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있으면서 태고라 호(號)하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태고종은 매년 가을 태고탄신 다례재를 봉행하는 것은 이같은 연유에서, 삼각산(북한산) 태고사 태고보우원증국사 탑비 앞에서 탄신 다례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태고 스님이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조정이 원융부를 설치하여 모든 종파를 통합하게 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종 구산을 통합하여 임제종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복고 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이런 역사적 근거는 《유창선도증국사행장》(維昌撰圖證國師行狀)(공민왕 5년)에 의해서다. 공민왕은 보우스님의 건의를 수용해 곧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 통합에 착수하였고 한양에 궁절을 짓게 하였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호주 하무산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동국(東國) 임제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 부분도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다. 태고보우 국사는 당시 신돈이란 스님의 견제를 강하게 받았는데, 항상 적이 있고 반대파가 있기 마련이지만 태고보우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돈(辛旽)이 투기하여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다가, 신돈이 죽은 뒤에 국사가 되었다. 신돈은 역사에서 요승으로 낙인 찍혔지만, 태고보우스님은 한국불교의 종조이면서 태고종의 종조로 존경받는 위상으로 영원한 역사의 승리자가 되어 있다. 우왕 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입적하니, 세수 82세. 법랍 69세 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가 태고사에 있다.

태고국사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산선문의 원융과 오교홍통 등 제종포괄로서 국민사상의 통일과 원융을 도모하였고, 밖으로 한양천도론과 홍건적의 난을 대비하는 등 위교위민의 지도자적 태도이다. 무엇보다도 태고보우원증국사의 위대성은 19세에 선을 참구하기 시작해서 26세에는 화엄선에 합격하고, 교와 선의 겸수에 철저하셨고 또 그것이 전불교계에 영양을 주어서 그뒤 한국불교인 수행의 표준이 되어서 한국불교의 큰 특징을 이루었으며 국사께서는 자신의 수행이나 사상적 이론만이 아니라 공민왕의 왕사로서 원융부를 설치하여 제종을 포괄한 뛰어난 실천력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한다면, ’구산원융오교홍통‘이다.

 

III. 태고종의 미래

태고종의 미래를 좀 이야기 해보면, 일차적으로는 태고종 2세대들의 책임이 크다. 1세대인 대륜, 묵담, 덕암, 영희, 남허, 정암, 용봉, 영지, 보성, 백암, 월하 서봉, 도봉, 송암, 만봉, 윤종근, 용곡 등 이루 다 열거하려면 한이 없다. 1세대들을 한 분 한 분 파악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미처 여기 이름을 올리지 못했더라도 문손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2세라고 하면 지금 종단의 언로 급들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1세대들이 남겨 놓은 태고조의 유산을 유지하는데 문제가 많았음을 인정해야 하고, 새로운 태고종을 건설해야 한다. 2세대들이 태고종의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종도들을 잘 이끌지 못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이 있지만, 태고종은 ‘전통 종단’ ‘정통종단’이다. 전통과 정통을 설명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태고종사(太古宗史)》를 읽어야 한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태고종사》를 정독해야 한다. 역사를 모르면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태고종사’는 여러분이 시간을 갖고 정독하도록 하고, 종명과 종지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 보자. 왜 ‘한국불교태고종’이냐 하는 것이다. ‘태고종’이란 종명은 태고보우 국사로부터 연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태고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께서는 태고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간단하게 결론적으로 말해서 태고보우국사를 왜 한국불교의 종조로 모셨는지 이다. 1956년 이전에는 한국불교는 하나였다. 여기서 또 이른바 ‘비구.대처 분규사’를 논하려면 장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또 여러분이 ‘태고종사’를 정독하다보면 분규사의 체계가 서게 될 것이다. 왜 태고보우 국사가 한국불교의 종조였고, 태고종의 종조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한국불교 1천 7백년사에 태고보우 국사가 법맥으로 보나 깨달은 견처(見處)로 보나, 부처님 경지에 가장 가까운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 역사상 태고보우 국사를 한국불교의 종조로 모셔 왔던 것이다.

종단에 관계없이 태고보우 국사를 종조로 모시는 큰 스님들이 한 두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고, 여러분은 차차로 이런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종세(宗勢)가 강하고 교세(敎勢)가 강하고 큰 사찰을 점유하고 있다고 해서, 종조문제 까지도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모셔온 한국불교가 어느 날 갑자기 환부역조(換父逆祖: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꾼다는 뜻)를 한 것이다. 진실은 잠시 속일 수 있을지라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종헌 제2조에 ‘본종은 여말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 단일종(單一宗)을 창수(創樹)하신 太古普愚國師를 宗祖로 한다.’로 되어 있다. 한마디로 고려시대 모든 종단을 한마로 통합해서 하나의 종파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종지(宗旨)는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근본교리(根本敎理)를 봉체(奉體)하고 太古宗祖의 宗風을 宣揚하여 見性成佛 傳法度生함을 宗旨로 한다.’로 되어 있다.

풀어서 설명해 보면, 자각각타란 말은 나도 깨닫고 다른 사람도 깨닫게 한다는 의미이다. 각행원만한 근본교리의 봉체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궁행한다는 뜻이다. 태고종풍을 선양하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는 것은, 태고스님의 수행법을 따른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바로 견성성불을 위한 참선수행을 말하고 중생제도란 포교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태고종의 소의경전을 한번 이야기 해 보자.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화엄경》이라고 했다. 또한 기타 경전의 연구와 지송(持誦)은 제한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분은 경학 공부를 어느 정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문공부 한역불전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한글을 경시하자는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 불교는 인도의 불전을 전부 한역(漢譯)을 해서 체계화했기 때문에 한역경전을 보고 연구하지 않으면 불교의 체계를 세우는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신학문도 중요하고 박사학위도 필요하지만, 불교 공부는 전통적인 강원 공부가 중요하다. 종단에서는 그래서 중앙승가강원이 있고, 선암사에 승가대학이 있다. 《금강경》 《화엄경》이 본종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에 한역 《금강경》 《화엄경》 원문을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우선은 한문 실력이 있어야 독해(讀解)를 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불공시식이나 하고, 승복만 번지르르하게 입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대중생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습의(習儀)를 익혀야 하고, 승가화합의 육화(六和) 정신을 익혀야 한다. 출가득도수계 산림을 할 때, 본종에서는 선암사 정수원에 가서 3개월간 합동 수련을 하도록 하는 것은 다 이 같은 기본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승니(僧尼) 수 늘린다고 기본교육 과정도 거치지 않고 받아들이면, 나중에 꼭 탈이 나고 만다. 대개 보면, 적당히 수계 득도한 친구들이 사고를 친다. 부처님 시대에는 6군비구라고 했고, 적주비구라고도 했다. 인도에도 가짜 비구가 많았었다. 외도(外道)라고도 하지요. 딴생각하면 바로 외도인 것이다. 중이 중 생각하지 않고 엉뚱한 생각하고 딴 짓한다면 그들이 바로 6군 비구요 적주 비구이다.

 

IV. 나가는 말

이제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러분들은 태고종도가 되었으니까, 태고종도다운 언행을 해야 하고 태고종도로서의 종지종풍을 따르는 태고종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출가의 근본이 무엇인가? 견성성불 광도중생이란 큰 사명을 띠고 가족은 물론이고 일가친척을 다 멀리하고 방포원정의 길에 들어섰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삭발염의란 무소유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심성을 밝혀서 자아완성이란 인격자가 된 다음, 부처님의 교시대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승가공동체의 전통과 가풍에 따라야 한다. 이런 출가자로서의 근본 도덕과 윤리를 모르고 속물적인 사고(思考)나 언행(言行)을 한다면 출가사문의 길과는 다른 길이 되고 만다.

다음은 태고종도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태고법손이 되어야 한다. 태고 종지.종풍을 잘 따르고 종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태고보우원증국사의 법맥을 계승하는 법손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부처님으로부터 출발했지만, 불교의 전통과 가풍은 각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변용된 불교전통으로 정립되었다. 태고종도 이;런 맥락에서 태고종이라는 하나의 종파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태고종의 종승과 태고조의 정체성을 알아야하고 태고종에 적응하는 종도가 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운경원로의원스님 약력

1959년 출가하여 백련사주지 역임.

현재 백련사 회주. 태고종단 크고 작은 소임을 두루 역임.

각종 사회복지 시설에 후원하여 그 공로로 대통령상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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