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스님은 현재 태고종 동방불교대학 범패과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스님은 일주일 한 번씩 전승관 동방불교대학 강의실에서 범패를 강의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단 한회도 쉬지 않고 출강하고 있으며, 범패과를 사실상 활성화하고 있다. 태고종 하면 속칭 염불(범패)이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붙어 있듯이 석화스님은 그야말로 사명감 하나로 후학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태고종은 대승보살승단이므로 생활불교를 지향하고 있다. 대승보살승단이란 개념은 불교 승가의 전통적인 출가수행주의를 지양하고 생활 속의 불교를 지향하는 보살승단을 구현한다는 의미이다.

석화스님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출가하여 삼발염의한 승려(니)라면 선교밀정(禪敎密淨)을 다 두루 통하여 섭렵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아왔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통불교적인 덕목으로서 승려라면 참선도 하고 경도 보고 염불도 하고 진언주문도 하면서 불사도 하는 다목적 수행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절집 안에서는 또는 불교에서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는데, 출가승이 염불이나 하고 목탁이나 치면 이상하게 보는 잘못된 인식이 생겼는데, 이런 관점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염불은 불교의 의례이지, 단순한 기도수준의 종교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 인식하고 퍼뜨리게 된 것은 법난 이후, 불교의식을 모르는 스님들이 절을 차지하다보니, 의식에 대해서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대개의 큰 절들은 총림규모로서 수백 명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때는 스님듫이 자기 맡은 바의 소임이 각각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선원 강원 염불원 율원 등이 있었고, 외호 대중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화주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모를 정도로 화주승의 역량과 위치는 대단했다.

일단 시주가 들어와야 절이 유지되기 때문에 화주승은 주지나 조실 스님보다도 사실은 더 대우를 받고 권위가 있었다. 절에 토지가 많이 생기고 살림이 풍족해지기 까지는 다 이런 화주승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절 안에서는 또 지전(持殿)스님들의 역할 또한 대단했던 것이다.

불공 시식이 많이 들어와야 절 살림에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범패의식에 능하게 되는 것은 필연지사였다. 이런 불교의 전통이 근대를 거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에 전승되었던 것이다.

태고종의 입장에서는 관광사찰도 아니고, 거의가 사설사암인지라 각자도생해야하는 어려움을 갖고 있는 바, 우선은 범패를 알아야 사암 운영에 일차적으로 대처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태고종도로 입문하면 의식을 먼저 마스터 하는 것은 필수과정이다. 이런 종단의 사정을 십분 이해하고, 편백운 총무원장스님께서는 동방불교대학에 범패과를 신설, 태고종도들이 범패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 석화스님은 범패의 역사를 대강 설명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범패의 역사는 ≪삼국유사≫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조(兜率歌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760년(경덕왕 19)에 하루는 해가 둘이 떠서 서로 교대하여 해가 지지 않는 괴변이 생겼다. 이때 일관이 말하되 “범패승을 데려다가 <산화공덕 散花功德>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괜찮을 것이라.” 하여, 왕이 단을 쌓고 범패승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이라는 승려가 지나가므로 왕이 불러 범패를 부르라 하니 그 승려는 오직 향가만을 알 뿐 범패를 모른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진감선사 이전에도 범패를 부를 줄 아는 승려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진감선사와 같은 시대 사람인 일본 승려 원인 자각대사(圓仁慈覺大師)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중국 산동반도 등주(登州)의 적산원(赤山院)이라는 신라인의 절에서 불린 범패가 당풍(唐風)과 향풍(鄕風:新羅風), 그리고 당나라 이전에 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고풍(古風:日本風),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의 범패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범패가 상당히 성행하였으리라고 짐작은 되나 문헌이 없어 잘 알기 어렵다. 다만 고려의 역대 왕들이 연등회(燃燈會)를 성대히 행했으며,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왕궁에 설하고 대규모의 도량을 설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범패도 성행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범패는 대휘화상(大輝和尙)이 쓴 ≪범음종보 梵音宗譜≫(1748)에 의하여 상세한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국융(國融)-응준(應俊)-혜운(惠雲)-천휘(天輝)-연청(演淸)-상환(尙還)-설호(雪湖)-운계당법민(雲溪堂法敏)-혜감(慧鑑)-순영(絢暎) 등 많은 범패승의 이름이 보인다.

이 밖에 ≪신간산보범음집 新刊刪補梵音集≫(1713) 등에도 상당히 많은 범패승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11년 6월에 사찰령이 반포되고 그 취지에 따라 이듬해에 각본말사법(各本末寺法)이 제정되자 조선 승려의 범패와 작법(作法)이 금지되었다.

화청과 법고춤 같은 것을 금한 각 본말사법 시행 이후 범패도 쇠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행히 망하여 없어지지는 않았다. 경만 읽고 범패를 부르지 않는 절에는 재가 들어오지 않아, 재가 있는 한 범패는 존속하였다. 다카하시(高橋亨)의 ≪이조불교 李朝佛敎≫(1929)에는 “근년까지 경성 교외 백련사(白蓮寺)에 만월(滿月)이라는 노승이 있어 범패로 유명하였다.

원래 경성의 동서산(東西山)에 각각 만월이 있어 선성(善聲)이 서로 백중하였다. 이만월은 즉 서만월(西滿月)이라고 한다.” 라고 적고 있다. 백련사 이만월(李滿月)의 제자로는 백련사의 이범호(李梵湖), 봉원사(奉元寺)의 이월하(李月河), 진관사(津寬寺)의 김운제(金雲濟)가 있었고, 동교(東郊)의 이만월의 제자로는 경국사(慶國寺, 靑庵寺)의 대원(大圓)과 영도사(永度寺, 開雲寺)의 전우운(田雨雲), 신흥사(新興寺)의 완담(完潭), 화계사(華溪寺)의 동화(東華), 흥국사(興國寺)의 표금운(表錦雲) 등이 있었다. 범패는 주로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수륙재(水陸齋)·영산재(靈山齋) 등 다섯 가지 재에 쓰인다.“라고 범패에 대한 역사를 대강 설명했다.

동방불교대학에서는 조석예불은 물론 불공 시식 천도재 다비식 까지도 집전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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