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종교, 칭기즈칸의 종교관

칭기즈칸 동상 박물관에서 《몽골비사》화가와 필자.
칭기즈칸 동상 박물관에서 《몽골비사》화가와 필자.

 지금은 몽골의 종교라고 하면, 티베트에서 전해진 불교를 들 수 있다. 티베트 불교는 3대 종파가 있는데, 몽골에 겔룩빠(종파)가 집중적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현상은 몽골 제국 특히 중국에 세워졌던 원(元) 제국이 멸망하고 북쪽인 몽골고원으로 쫓겨 간 다음, 북원(北元)을 세운 16세기 중후반 때이다. 겔룩빠는 쫑까빠(Tsongkhapa1357〜1419)란 티베트의 고승이 세운 일종의 개혁종파이다. 인도로부터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8세기 이지만, 겔룩빠는 14기에 창종되었고, 16세기 말 북원의 알탄 칸 황제의 후원으로 이 종파(일명 황모파)가 몽골 고원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인도에 망명 중인 14세 달라이 라마 역시 겔룩빠 소속이다. 그러면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불교가 전해기전에는 어떤 종교를 가졌는가.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세우기 전에는 샤머니즘과 텡그리즘(Tengrism)이 주류종교였다. 텡그리즘이란 샤머니즘, 애니미즘, 토테미즘, 다신교 또는 일신교, 조상 숭배 등의 특징이 나타나는 중앙아시아 특유의 종교를 가리키는 현대의 용어이다. 튀르크, 몽골, 헝가리, 흉노 민족의 전통 종교였다. ‘텡그리’란 ‘하늘’이라는 뜻이다. 텡그리즘의 사상가운데는 주위 세계와의 조화롭게 살면서 하늘을 숭배하는 것이 주된 원리이다.

   이런 종교적 전통을 가진 몽골인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칭기즈칸만 하더라도 샤머니즘과 텡그리즘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고, 대칸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유라시아를 누볐지만, 그의 종교관은 일관되게 샤머니즘과 텡그리즘의 영향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고, 불교의 고승과 도교의 신선을 만나서 대담을 나눈 기록이 전하고 있다. 칭기즈칸이 몽골초원에서 중국을 비롯한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전쟁 중이었지만,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하고, 1214년에는 해운(海雲)이란 고승에 대해서 듣고서 만나기도 했지만,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는 안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은 고승 해운에게 머리를 기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고승 해운은 이를 거절하자 칭기즈칸은 그대로 허용했다고 하며, 1219년에 한차례 더 만나서는 후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승 해운은 칭기즈칸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 못했지만, 그의 손자인 원 제국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는 점수를 많이 따서 그의 왕사가 되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이슬람의 지도자도 만났다고 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도교의 장춘(長春)이라는 도교의 지도자였다. 칭기즈칸은 불교고승과 유교의 지도자에게도 관심을 갖기는 했으나 칭기즈칸은 그가 죽기 전에 도교의 신선 장춘을 만나고자 해서 장춘은 칭기즈칸의 서정(西征)의 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칭기즈칸 초상화 (타이완 국립박물관 소장)
칭기즈칸 초상화 (타이완 국립박물관 소장)
칭기즈칸이 만나서 감명을 받은 도사 - 장춘자(구처기) 초상화.
칭기즈칸이 만나서 감명을 받은 도사 - 장춘자(구처기) 초상화.

  장춘은 본명이 구처기(丘處機 1148〜1227)로서 도교 종파인 전진교(全眞敎)의 도사(道士)였다. 자는 통밀(通密)이며, 장춘자(長春子)는 전진교에서 받은 도호이며 장춘진인(長春眞人)은 그 존칭이다. 산둥 성 서하(棲霞)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전진교의 개조 왕중양의 제자 북칠진(北七眞) 중의 한 명이며, 왕중양, 마옥, 담처단, 유처현에 이어 전진교의 5대 장문이었다. 전진교 용문파(龍門派)의 개조이기도 하다. 원나라 때 전진교를 융성시킨 것은 구처기의 공적이 크다고 하겠다. 1222년에 서아시아 원정 중이였던 칭기즈칸의 초청을 받아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자인 이지상 등과 함께 멀리 서역까지 여행을 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칭기즈칸을 만났다. 불로장수의 비결을 묻는 칭기즈칸에게 전진교의 가르침을 설명하였고, 칭기즈칸은 이에 보답하여 장춘진인에게 몽골 제국의 점령지 어디서라도 전진교를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어 주도록 약속했다.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 및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은 그 서역 여행 때의 기록이고, 장춘진인 일행이 거쳐 간 당시의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현재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장춘은 서역에서 귀국 후 연경(북경)에 있는 장춘궁(천진관)에 살면서 폭넓게 대중의 신앙을 모으고, 칭기즈칸이 죽던 해에 생을 마쳤다.

  이상의 스토리에서 알 수 있듯이 칭기즈칸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이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이 60세가 넘어서 장춘자(長春子)를 전장에서 만나기를 원했던 것은 아마도 인생무상을 느끼고 뭔가 정신적인 공허를 메워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도사인 장춘자도 칭기즈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위자연의 도리로서 무욕밖에 더 설명했겠는가. 여행기를 읽어보면 장춘자는 칭기즈칸에게 살생을 금하고 동물을 애호하고, 섭생을 권했다. 장춘자 자신은 철저한 채식주의자이였기에 육식을 하지 않고 뭔가 고상한 풍모로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이 장춘자로부터 다소의 감명을 받아서 마음에 위안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 황제들은 공중 앞에서 종교 간의 교리적 경쟁을 시켰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칭기즈칸은 유목생활의 특성상 몇 군데에 공공 예배 장소를 설치해서 몽골인들이 고유 신앙행위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후계자 3남 어거데이는 제국의 수도 카라코람(Karakorum)에 불교 이슬람교 도교 기독교 등 각 종교의 건물을 지어서 각자의 성향대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 당시의 지배적인 종교는 샤머니즘과 텡그리즘이었고, 어거데이 또한 몽골의 전통 종교를 신봉했으나 그의 부인은 경교를 믿었다고 한다.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에 칭기즈칸의 종교적 관용에 의해서 많은 몽골인들이 전통종교에서 개종을 했다고는 하지만, 원 제국이 들어서면서는 티베트 불교를 수용했다. 칭기즈칸은 비록 그의 당대에 불교의 고승과 도교의 도사를 만나서 뭔가 정신적인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는 몽골인들의 전통 종교적 관념을 떠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야수성을 지닌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들을 파괴했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무엇인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참회하는 마음에서 불교의 고승과 도교의 도사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려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몽골 울란바토로= 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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