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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원응스님의 지상강의 - 8 (마지막회)
원응스님의 지상강의 - 8 (마지막회)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8.08.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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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교육제도와 불교교육

“중국에서의 불교교육은 한역(漢譯) 그 자체가 불교교육이었으며, 주로 사원에서 행해졌다. 중국불교는 사실상, 한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래했지만, 정착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고 유교와 도교와의 교섭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격의불교(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의 경전을 중국 고래의 고유사상인 특히 노장사상의 용어를 사용하여 해석한 태도를 말한다. ”

중국 쓰촨성 써다현 해발 3700미터에 위치한 오명불학원(五明佛學院:라룽가르)사원대학촌, 약 5만 명의 티베트 학승들이 몰려서 공부하고 있다.
중국 쓰촨성 써다현 해발 3700미터에 위치한 오명불학원(五明佛學院:라룽가르)사원대학촌, 약 5만 명의 티베트 학승들이 몰려서 공부하고 있다.

  고대중국은 우(虞) 나라 순(舜, 2257–2208 기원전) 임금시절의 상상(上庠)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상상은 귀족 자제를 위한 학교였고, 하상(下庠)은 서민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상(庠)의 의미는 기른다는 양(養)의 뜻이다. 주나라 때는 다섯 개의 국립대학이 있었다. 상상(上庠), 벽옹(闢雍), 동서(東序), 고종(瞽宗)과 성균(成均)이다. 벽옹은 중앙에, 동서는 동쪽에, 성균은 남쪽, 고종은 서쪽이며 상상은 북쪽에 있었다. 상상은 천자 제후의 자제를 나머지는 봉건영주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육례(六藝:禮 樂 射 禦 書 數)를 가르쳤다. 춘추전국시대는 諸子百家의 시대다. 하지만 가장 이름 있는 학교는 유학을 가르치는 공자의 학교였다. 공자는 ‘유교무류 인재시교(有教無類  因材施教)’의 정신으로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의 능력에 따라서 가르쳤다고 한다. 진시황 시절에는 교육의 퇴보를 가져왔다. 그는 병법을 좋아해서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한나라 무제는 유교를 좋아했다. 국가의 교육이념을 유교로 하고 그는 태학(太學: 한나라에서 수나라 시대의 고등교육기관이다. 장안과 각 지방 현에 설치하였다. 태학은 유교를 가르치고 중국문학을 가르쳤다)을 설립했다. 중국에서 관료의 등용을 위한 국가의 과거시험은 605년에 시작됐다. 이 제도는 1905년까지 시행됐으며, 과거를 위한 교육은 관학과 서원 등에서 이루어졌는데, 백록동서원과 동림서원은 유명하다. 이원(梨园) 이라는 국립음악학교는 8세기에 생겼는데, 여기서는 武班도 있었는데, 1178년에는 武學이 창설됐다.

  중국의 고대 교육기관은 상상에서 유래되며 국립대학인 국학(國學)의 명칭은 상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성균(成均)은 또 다른 중국고대 교육기관의 이름이다. 한 나라 때는 국립대학을 태학이라고 했으며, 수나라부터 청나라까지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렀다.
 중국에서의 불교교육은 한역(漢譯) 그 자체가 불교교육이었으며, 주로 사원에서 행해졌다. 중국불교는 사실상, 한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래했지만, 정착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고 유교와 도교와의 교섭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격의불교(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의 경전을 중국 고래의 고유사상인 특히 노장사상의 용어를 사용하여 해석한 태도를 말한다. 불교전래이래 東晋 경까지 성행했으며, 대표적인 역경가는 지둔이다.)가 생겨나고 유교의 강력한 도전을 받기도 했다. 오호십육국의 혼란기에는 오히려 불교가 다소 관심을 끌게 되었고,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 그 모양이 갖춰졌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주 종교로 부상했으며, 5세기 초에는 경쟁관계인 도교를 앞서는데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사치에 빠진 결과로 北周의 武帝와 당나라 武宗에 의해서 재산 몰수를 당하기도 한다. 중국불교사에서는 이것을 三武一宗의 법난(法難) 또는 폐불(廢佛)로도 부른다.
   
  중국불교사에서 삼무폐불(三武滅佛) 또는 三武之禍라고 하며, 三武一宗의 法難이라고도 한다. 北魏의 太武帝、北周의 武帝、唐나라 武宗 등 3차에 걸친 불교 박해를 일컫는다. 당의 武宗의 仏教 탄압은 회창의 폐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北魏의 太武帝(在位:423年-452年)는  太平真君 년간에, 北周의 武帝(在位:560年-578年)는 建徳 년 간에, 唐의 武宗(在位:840年-846年은 会昌 년간에, 後周의 世宗(在位:954年-959年은 顕徳년간이다. 일본에서도 중국과 유사한 폐불훼석(廃仏毀釈)사건이 있었다. 명치유신 후에 성립된 신정부가 경응 4년 3월13일(1868년)에 시발됐다. 太政官 布告인「神仏分離令에 의해서다. 明治3年1月3日(1870年2月3日)에는 불교사원, 불상 경권을 파괴하고 僧尼 出家者 特権을 폐지한 것이다. 明治3年1月3日(1870年2月3日에 시행된 詔書「大教宣布」에서는 神道国教・祭政一致의 政策을 시행하여 仏教施設의 破壊를 지시했다. 그리고 정부는 강제로 출가승려 들에게도 세속적 삶으로 돌아가게 해서 대처제도가 생겨났다.

   한국불교사에서는 조선조에 숭유억불정책에 의한 불교탄압이 오랜 기간 행해져 불교의 교세는 거의 사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군사정권은 1980년 10월27일 전국의 유명사찰을 불시에 난입하여 일부 승려들을 연행해갔다. ‘10.27法難’이라고 부른다. 지금 10.27법난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 진상을 규명하고 있다.

  일종의 불교박해인 것이다. 이런 역사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당나라 때 불교는 단연 현장 삼장이 인도에서 17년간 유학을 하고 많은 梵本 경전을 갖고 귀국해서 국가의 지원으로 한역을 하면서 불교교육은 본격화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西安)은 불교사상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곳은 한국과 일본에 불교를 본격적으로 전해준 센터였다. 돈황의 막고굴, 낙양의 용문 석굴과 운강석굴 등이 隨. 唐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8세기에 조성된 여산의 大佛은 세계에서 가장 큰 石佛이다. 특히 당나라 시대에는 한역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불교교육은 바로 이 한역장(漢譯場)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장법사를 흔히 三蔵法師라고 부르는데. 삼장법사는 경율론(経・律・論蔵)의 三蔵에 정통한 승려(法師)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訳経僧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특히 인도나 서역에서 敎典을 가지고 와서 한역을 하는 사람을 존칭해서 ‘訳経 三蔵’ 이나 ‘聖教 三蔵’이라고 해서 三蔵法師”로 불렀던 것이다.

  4대 역경가로서 구마라즙(鳩摩羅什)、진제(真諦)、불공금강(不空金剛)은 많은 경전을 손수 한역했으며, 이 분들을 삼장법사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삼장법사로 가장 유명한 승려는 당나라 때의 현장 삼장이다. 현장 삼장은 불교의 경문 원전을 인도에서 직접 가져와서 장안의 대자은寺에서 국립번역원인 譯經場을 설치하고 많은 경론을 한역했다. 여기의 국립 번역원에서 역경에 종사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불교교육이었다. 중국 전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 일본 월남에서 까지 와서 번역에 종사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北周(556-581)代에서는 현소(昭玄) 삼장이나 주국(周国) 삼장 등의 승관(僧官)을 칭하기도 했다. 隋代의 《歴代三宝紀》이후, 삼장법사는 삼장禅師나 삼장律師라고도 했다. 역경의 역사도 현장삼장이후에는 역장열위(訳場列位)의 제도를 도입해서, 역경을 체계적으로 제도화해서 시행했던 것이다. 고역(古譯)에서는 범경(梵経)을 한역했던 실태에 관한 기록이 없었으나, 현장 이후의 新訳 시대의 역경의 경우에는 한역된 경전의 권수(巻首), 경전의 제목을 ‘訳場列位’를 기록하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記名에는‘筆受’ ‘訳語’의 역할을 나누어서 분명하게 했으며, 그 가운데서도 예를 들면 역주(譯主)가 있는데, 이 자리는 반야삼장(般若三蔵)이 있고, 예를 들면 이 경은 반야訳이라고 経録(목록)에는 기록하는 것이다. 반야삼장이 梵文에 기록된 원전을 범어로 音読하고, 그것을 ‘筆受’ 者는 써서 기록하고, 다시 그것을  한자로 치환(置換)하는‘訳語’가 있다. 그 후에 ‘증의(証義)’나 ‘윤문(潤文)’ ‘참역(参役)’등의 각종의 역할을 갖고  한역경전을 적절한 経文으로 校訂하고、역경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경전의 한역 사업은 2세기 후반부터 11세기말까지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역경의 수집, 분류, 경전의 진위 판별이  필요했었다.  4세기 말에 석도안의 経録인 《綜理衆経目録》이 망실되고, 6세기 초 승우의 《出三蔵記集》이 작성됐다. 북조에서는「一切経」, 남조인 梁에서는「大蔵経」이 성립되고, 수・당 초에는 이 양자의 명칭이 확립됐다. 사경(写経)의 서식도 1행 17자 전후로 정착되었다. 수・당 시대에도 도선의 《大唐内典録》등의 経録이 편찬되었다. 후대에 영향을 준 것은 730(開元 18)년에 완성된 智昇 찬 《開元釈教録》20권이 있다. 남북조 이래의 경전 분류법을 답습한 대승의 삼장과 소승의 사망으로 聖賢 集伝으로 三大別하고 、대승경전을 반야、보적(宝積)、대집(大集)、화엄、열반의 五大部로 대장경에 편입하여  불전의 총수를 5048권으로 결정했다.  5048권의 經律은 북송 이후의 인쇄 대장경(一切経)의 기준이 되었다.

원응<주필, 종립동방불교대학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