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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2018)년 08월 16일 목요일
[불교기행] 원응 스님의 몽골 –시베리아 불교기행-⓶
[불교기행] 원응 스님의 몽골 –시베리아 불교기행-⓶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8.07.1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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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술대회: 미륵불의 사랑과 자비
몽골 통일부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 미륵불 사랑과 자비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
몽골 통일부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 미륵불 사랑과 자비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

  이번 몽골 행은 미륵대불 점안 낙성법회도 있었지만, 국제심포지엄도 개최됐다. 대개 국제 불교행사를 하면 이벤트 형 행사가 대부분인데, 몽골에서 미륵대불 점안낙성법회가 열리고, 국제학술 대회가 열렸다는 데에 의의를 둬야하겠다. 몽골을 모든 분야에서 후진국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다면 수정할 필요가 있다. 몽골은 단순히 아시아의 변방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소련의 위성국가로 70여 년 간 러시아 즉 유럽문화권이었다. 초원의 나라라고 해서 노마딕(유목)의 나라요 문화라고만 전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시절에는 오히려 유목국가다운 모습보다는 러시아풍의 나라로 발전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목표로 삼았다. 시골 같은 데에서는 유목생활을 하고 다소 옛날 모습의 몽골풍이 강했지만, 필자가 ‘90년 초 몽골을 찾았을 때는 러시아의 위성국가로서 식민지 국가 같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난 30 여 년 동안 이런 문화와 모습이 많이 지워졌다고나 해야 하겠다. 최근 들어서 몽골다운 옛 전통과 역사가 복원되고 있다고 간단히 정리하자.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각국불교대표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각국불교대표

 불교에 있어서도 1920년대 초부터 1990년 초 까지 무려 70년 간 공산치하에서의 관제불교였다. 공산화되기 전만해도 수만 명의 라마가 있었고, 수백 개의 라마사원이 있었지만, 공산권 치하에서는 단하나의 관제사원만 인정했고, 라마도 불과 3백 명 미만이었다. 불교는 자연히 지하로 잠재할 수밖에 없었고, 불교는 위축되고 관의 통제와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불교가 존재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간단사원 칼라차크라 탄트릭센터 소장 다블라 라마와 함께 기념촬영.다블라 라마는 공산치하 이전의 라마승들로부터 만다라제작기법을 전수받았다.
간단사원 칼라차크라 탄트릭센터 소장 다블라 라마와 함께 기념촬영. 다블라 라마는 공산치하 이전의 라마승들로부터 만다라제작기법을 전수받았다.

정작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몽골이 소련의 위성국가였지만, 일반 학문 활동이나 불교학술연구 마저 후진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몽골은 티베트-몽골계 바즈라야나(금강승) 불교 전통이지만, 티베트-몽골어 대장경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티베트어는 불교 4대 경전어(經典語)이고, 몽골어(몽골 전통문자)는 준 경전어로 인정받고 있다. 중세 몽골어는 몽골 문자 또는 한자로 표기되었으며, 몽골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쓰기로 쓰였고, 한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로 쓰였으며 표의보다는 몽골어에 대한 표음에 맞추어져 있었다. 현대에는 키릴 문자(몽골에서 사용)와 몽골 문자(내몽골 자치구에서 사용)의 두 가지 문자로 표기된다. 몽골대장경은 중세 몽골문자로 되어 있다. 여기서 긴 이야기는 못하지만, 몽골에서의 불교연구는 티베트어와 중세몽골문자를 해독해야 가능하다. 대부분의 라마들은 지금 인도의 티베트 사원대학에 유학하는 것을 정통코스로 생각하고 있다.

학술대회의 통역을 맡은 몽골의 신진학자들
학술대회의 통역을 맡은 몽골의 신진학자들

 몽골불교기행에서 우리는 몽골의 먼 조상들의 이야기를 알아야 몽골이라는 나라의 숙제가 풀린다. 몽골의 조상들은 흉노였다. 먼저 흉노와 흉노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가 보자. 몽골고원의 역사는 흉노로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 몽골족은 오랑캐였다. 초원의 유목민족인 몽골족은 중국의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화되지 않은 비 세련된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몽골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야말로 자연과 함께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민족이라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마천이 그의 불후의 명작인 역사서인《사기(史記)》권 110에서 <흉노열전(匈奴列傳)>을 소개함으로써, 흉노 즉 오랑캐라는 관념이 고정화되었다. 사실, 한민족은 언어학적으로나 종족의 관점에서 보면 몽골족과 먼 조상이 같고, 우랄알타이어족에서 몽골어와 퉁구스어로 갈라진 같은 어족이면서도 중국 한. 당. 송. 명 시대의 문화나 성리학을 존숭하는 사대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듯 한 태도를 취한다.

기원전 250년경 흉노의 최대 강역.
기원전 250년경 흉노의 최대 강역.

요나라는 내몽고와 만주를 배경으로 한 거란족이 세웠고, 금나라는 퉁구스계인 만주족인 여진족이 세웠고,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들인데도, 우리는 당송이나 명나라를 중국의 정통으로 보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다. 사실 요금원(遼金元)이나 청(淸)은 한민족인 퉁구스계와는 사촌지간들인 것이다. 퉁구스계는 바이칼 호에서 동 몽골을 경유하여 만주를 거쳐서 한반도로 이주해왔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볼 때, 흉노는 우리와 먼 친척이 아니겠는가. 중국불교나 동아시아불교를 연구하는 분들 거의가 한당송명 불교를, 특히 송 대의 선불교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고, 비중국계 민족의 불교는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나 본 몽골 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흉노이며 선비족임을 당연시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자들은 한국은 먼 친척의 나라임을 당연하게 여겼다. 칭기즈칸의 경우에는 퉁구스계의 동호에서 갈라진 분파라는 가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골 인들은 흉노 선비 동호 등이 전부 몽골인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몽골고원은 흉노 선비족 등이 지배하다가 이후 몽골 고원과 중국의 북방을 장악한 나라들은 5호(胡) 16국이라고 해서 중국민족이 아닌 비 중국민족인 흉노(匈奴)·갈(羯:흉노의 별종)·선비(鮮卑)·저(氐: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의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여 1백 수 십년간 북위(北魏)가 일어날 때 까지 서로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이후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인 북위를 세운다.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하는데,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保衛)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掎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犍)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淝水)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화베이(華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진 남북조를 거치고 수나라 당나라를 지나서 송나라에 이르러서 북방민족은 10~12세기에 중국 북방에서 거란(契丹)이 세운 정복 왕조(916~1125)인 요(遼)나라를 세운다. 요는 비중국민족인 거란(契丹)이 중국 북방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로서, 916년 건국 당시의 명칭은 거란국(契丹国)이었지만, 938년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한 뒤 나라 명칭을 요(遼)라 하였다. 1125년 여진(女眞)이 세운 금(金, 1115∼1234)에 멸망되었지만,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에 서요(西遼, 1132∼1218)를 건국하여 1218년 칭기즈칸(成吉思汗, 1155?~1227)의 몽골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금나라는 퉁구스족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왕조(1115∼1234)이다.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지금의 松江省) 아청(阿城)에 있던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구다가 요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가 곧 금나라 태조(재위 1115∼1123)이다.  금나라는 그들의 근거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라 하였다. 금이라는 국호는 근거지인 안추후수이에서 금이 많이 산출된 점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조는 요군(遼軍)을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 허베이성(河北省)의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진출하였으며, 25년 제2대 태종(太宗:재위 1123∼1135) 때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와 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이후 금은 새롭게 등장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손을 들고 만다.

몽골 울란바토르: 원응 - 주필
몽골 울란바토르: 원응 -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