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여 명 운집한 다비식엔 한줄기 소낙비, 안개 낀 설악산도 울었다

백담사 만해마을에 마련된 설악당 무산대종사 빈소에 용대리 주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설악산의 큰 별이 졌다. 설악산에서 40여년을 살다가 지난 5월 26일 오후 5시에 원적에 든 설악당 무산대종사의 영결식이 지난 5월 30일 오전 10시 설악산 신흥사에서 엄수됐다. 27일부터 빈소가 차려진 신흥사와 백담사 만해마을엔 수많은 인파가 몰려서 고인의 원적을 아쉬워하면서 조문했다.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조계종 기본선원 백담사 조실(제3교구본사 신흥사 조실) 설악당 무산대종사의 영결식은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엄수됐다.

무산스님의 영정사진을 모시고 백담사 기본선원을 한 바퀴 돌고 있는 제자스님들.
 

설악당 무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天方地軸(천방지축) 氣高萬丈(기고만장)
虛張聲勢(허장성세)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영정사진을 모시고 백담사 무금선원을 돌고 있는 제자들.
무산스님이 5년간 안거 때 폐관정진을 했던 무금선원 무문관.

입적하기 며칠 전에 남긴 열반송이다. 생전에 수많은 화제와 무애행으로 일관했던 무산스님의 오도송은,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千經 그 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이다. 무산스님은 1989년 낙산사에 주석할 때, 불조대의를 투득하고 오도송 ‘파도’를 지었다.

이후 스님은 ‘아득한 성자’라는 시를 발표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은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 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설악당 무산대종사가 조실로 머물면서 수행한 설악산 신흥사 일주문.

  입적한 26일부터 설악산은 안개가 자욱했다. 하지만 30일에는 오전부터 화창한 날씨로 변했다. 신흥사 설법전 앞마당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불자와 추모객들이 몰려들었다. 무산스님은 평소에 자신이 죽으면 백담사 사하촌인 용대리 마을장으로 치러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나의 원수”라고 까지 당부의 글을 남겼지만, 세상은 그를 그렇게 소탈하게 보내지를 않았다. 장례위원회는 신흥사에서 조계종원로회의장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그래서인지 30일 영결식이 시작되기 전, 상좌들은 영정사진을 모시고, 백담사와 만해마을을 한 바퀴 돌고 와서 영결식에 참석할 정도로 당부의 말씀을 지켰다.

수백 개의 만장기가 무산스님의 법구를 인도하고 있다.

 영결식은 명종(5타) 개식 삼귀의 영결법요 헌다 행장소개 추도입정 영결사(원로의장) 법어(종정) 추도사(총무원장) 조사 조시 헌시 조가 헌화 인사말씀(문도대표) 서홍서원 순으로 진행됐다. 영결식이 끝나고 건봉사 다비장으로 운구되려는 순간, 가느다란 이슬비가 조금 내렸지만, 이내 그쳤다. 수백 개의 만장 기가 앞선 가운데 무산스님의 법구는 신흥사 일주문에서 작별을 고하고 다비장으로 향했다. 금강산 건봉사 다비장 연화대에 도착하자, 한줄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5분가량 쏟아지던 소낙비는 이내 그치고 금방 햇빛이 얼굴을 드러내고, 연화대는 불길에 휩싸였다. 너무나도 신기한 순간이었다. 다비장에 운집한 모든 사람들은 감동하는 듯, 모두들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 습골까지는 무려 다섯 시간 가량이 소요됐다. 무산스님은 다비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한 편의 연극을 하는 듯, 생을 마감했다.

금강산 건봉사 연화대 다비장에서 무애춤을 추고 있는 한 스님.

獻 詩

더 높은 극락보전(極樂寶殿)에 오르시어 불멸(不滅)의 사리탑 舍利塔 지으소서

-대한불교조계종기본선원 조실 설악당 무산霧山 조오현 曺五鉉 대종사 열반에 올리는 게송 偈頌

 

하늘이 흐립니다.

일월日月이 눈을 감고

이 나라 일천육백 년 불국토 佛國土를 밝혀오던

원광圓光이 꺼지고 있습니다.

국사國師이신 큰스님께서 열반하심에

설악 동해가 백두대간을 두 손에 받쳐 들고

백팔배百八拜를 올리며 통곡으로

무산 큰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을 염송念誦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산 큰스님은 이 나라 불교사와 현대문학사에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루신 다만 한 분의 크고 높으신

대종사大宗師가 아니옵고

누천년 조계법맥曹溪法脈을 일으켜 세우신 대종大宗이시며

민족의 정체성 담아낸

겨레시 시조를 창작으로 원력으로 중흥시킨

그대로 한국시조문학사이십니다.

대종사께서는 저 엄혹한 항일기抗日期에 태어나시어

부처님의 점지로 어린 나이에 입산득도入山得度 하시고

장경藏經을 모두 독파讀破 하시니

수행정진修行精進 하시매 대오온축大悟蘊蓄이

산을 짓고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한편으로 대종사께서는

저 원효元曉로부터 내려오는

불사상佛思想을 불입문자不立文字로 갈파喝破 하시니

지눌知訥 나옹懶翁을 잇는

선시禪詩를 현대시로 개창하시고

바로 만해萬海, 가람, 노산鷺山의 시적 승화를 뛰어넘는

새 경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올해는 시수詩壽 반백 년을 맞는 해이요.

첫 사화집 「심우도尋牛圖」를 상재上梓 하신지

마흔 해가 되옵니다.

그 첫 사화집을 제 손으로 꾸며드릴 때

참으로 외람되게도

제게 발문을 쓰라는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몇 자 올렸사온데

까막눈인 제가 읽기에도 우리 문학사의

“하나의 경이驚異”요 “희대稀代의 광석”이라 바쳤었지요.

돌이켜보니 「심우도」는 이 땅의 자유시, 시조를 통털어

하나의 개벽開闢이었고 신천지였습니다.

이 위에 만해萬海께서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지으신 법연을 떠받들어

『만해기념관』 『만해축전』 『만해마을』 등

대불사를 잇달아 일으키시고

「유심」을 문학지로 복간하셨으며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상』 『한국시조대상』 등을 제정

후학들의 창작 지원 등

오늘의 문학 불꽃을 피우는데

손수 기름이 되셨습니다.

아아, 무량한 사랑이옵시고 백세百世의 스승이신 무산 큰 스님!

바로 여드레 전 초파일 큰 절 드릴 때

손잡아 주시며 “사천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그 말씀은 어찌 아니하셨습니까?

한 번만 더 존안을 뵈옵고

손 한 번 더 잡아보고 싶습니다.

이제 어느 누가 계시어

제게 ‘현대시조백년제’를 맡겨 주시고

‘한국대표명시선100권’을 펴내게 해 주시고

『만해대상문학상』 『유심상』 『현대불교문학상』을 내리시겠습니까.

이 티끌세상 홀로 짐 지셨던

번뇌를 모두 사르시고

이제 큰 스님이 떠나신 이 천지 적막을

어느 누가 깨치겠으며

동안거冬安居 하안거夏安居 법회 때

사자좌獅子座에서 주장자拄杖子를 치시던

그 높은 법문 그 천둥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어디서 다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 사문沙門들의 삶의 길을 깨우쳐주신

백세百世의 스승이시며 어버이시며

친구이시며 연인戀人이셨던

오직 한 분! 무산 큰 스님!

사랑하고 사랑했습니다. 행복하고 행복했습니다.

너무너무 은혜로웠습니다.

부디 저 높디높은 극락보전에 오르시어

인류의 평화 겨레의 흠복을 만대에 누리도록 발원하는

불멸의 사리탑을 지으소서.

못 다 문자로 남기신 오도송悟道頌을 금자탑金字塔으로 올리소서.

왕생회향 往生廻向하소서

 

불기 2562년 5월 30일

사문 학림鶴林 이근배 李根培 돈수삼배 곡만 哭輓

병신년(2017년) 동안거 결제일에 설악산 신흥사 극락보전 앞에서 설악 무산 조실스님을 모시고 기념촬영
병신년(2017년) 동안거 결제일에 설악산 신흥사 극락보전 앞에서 설악 무산 조실스님을 모시고 기념촬영

신흥사. 백담사. 건봉사=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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