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점사 금강산 최초의 사찰, 60개 말사 거느린 대본산
인도서 53불상 조성, 쿠샨제국서 종 제작 이곳에 모셔와 전설

1900년대의 금강산 유점사의 전경. 금강산의 대본산으로 금강산을 비롯한 인근 군에 60개의 말사를 거느린 본사였다. 경성(서울)에는 불이성 법륜사(태고종 총무원)가 현존하는 유일한 포교당이다.
1900년대의 금강산 유점사의 전경. 금강산의 대본산으로 금강산을 비롯한 인근 군에 60개의 말사를 거느린 본사였다. 경성(서울)에는 불이성 법륜사(태고종 총무원)가 현존하는 유일한 포교당이다.

법기보살상주하는 화엄도량

금강산 유점사는 금강산 최초의 가람이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고려 때 민지(閔漬1248 ~1326)란 분이 찬했다.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충렬왕, 충선왕 때 정치외교가와 문인학자로 활약한 분으로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을 편찬한 관료와 학자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금강산 이름은 다섯 개라고 한다. 첫째 개골(皆骨), 둘째 풍악(楓嶽), 셋째는 열반(涅槃), 넷째는 금강(金剛), 다섯째는 지달(枳怛)이다. 앞의 셋은 옛 기록에 의한 것이고, 뒤의 두 개는 《화엄경》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주나라 본 《80화엄경》에 이르기를, “바다 가운데 보살이 사는 곳이 있는데 금강산이라고 한다. 보살이 있어 이름은 법기(法起)인데 그 권속들과 함께 항상 그곳에 머무르며 법을 설한다.”라고 하였다.   

 《금강산유점사사적기(金剛山楡岾寺事蹟記)》는 고려 후기인 1297년(충렬왕 23) 당시의 대표적 문인이었던 민지가 금강산 유점사의 관련 사적을 모아 찬술한 사적기로 이후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11세 법손인 건봉사의 보욱이 증보해 발간하였다.

민지는 중국 임제종 고승인 몽산 덕이(蒙山德異)의 제자 철산 소경(鐵山紹瓊)과 인도승 지공 선현(指空禪顯)을 존경하여 문도가 되어 불교와 관련된 비문과 사적기·영험기 등 여러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는 《화엄경(華嚴經)》에 의거,금강산이 법기보살(法起菩薩)이 상주하는 불교적 인연의 장소라는 점 말고도, 인도에서 조성한 53불이 항해한 지 900년 만인 신라 남해왕 때에 금강산에 도착하여 유점사가 창건되었다는 사항과, 불종(佛鐘)의 주조 내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유점사 능인보전(대웅전), 능인은 부처님의 뜻.
유점사 능인보전(대웅전), 능인은 부처님의 뜻.

보욱은 1861년(철종 12) 건봉사 연사(蓮社)에서 「무량수경중간서(無量壽經重刊序)」를 지은 바 있는데, 1871년에 민지의 사적기를 필사한 다음 여기에 《금강산유점사속사적기(金剛山楡岾寺續事蹟記)》를 부기하였다. 그 내용은 유점사의 중건 및 중수 때 시주한 사항과 고승들이 주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시주자로는 세조와 효령대군, 예종이 있으며 조선 중기는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조선 후기는 영조와 정조, 철종, 순종의 정비 순원왕후(順元王后) 등이 있다. 시주자에는 왕실 외에도 정난종(鄭蘭宗), 홍윤성(洪允性), 노사신(盧思愼), 한계희(韓繼熙), 김보근(金輔根), 김좌근(金左根), 이유원(李裕元) 등과 같은 유림도 기록되어 있다. 유점사에 주석한 승려로는 신의(信義), 성료(性了), 사명 유정(四溟維政), 천기 관휴(天機寬休), 보감(寶鑑)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책의 끝에는 강재희(姜宰熙)가 쓴 발문이 있다.

유점사하면 53불 존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古記》에 의하면, 주나라 소왕 24년 갑인년(기원전 1027년) 4월 8일에 우리 부처님 석가여래께서 중천국(中天國=인도) 가비라국 정반왕궁에서 탄강하셨다. 나이 19세에 이르러 성을 넘어 출가하고, 설산에 들어가 6년 동안 고행하며 정각을 이루었다. 79년 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주 목왕 임신년(기원전 949) 2월 15일 밤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사위성안에 9억 가구가 있었는데, 3억 가구는 부처님을 뵙고 설법을 들었으며, 3억 가구는 듣기는 하였으나 뵙지 못하였고, 나머지 3억 가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유점사 종을 주조했다는 월지국(쿠샨제국 기원후 30∼375)의카니슈카 왕 때의 최대 영토 지도.
유점사 종을 주조했다는 월지국(쿠샨제국 기원후 30∼375)의카니슈카 왕 때의 최대 영토 지도.

 우리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 문수대성이 있어 부처님의 유촉을 받들어 여러 보살들과 더불어 성중에서 교화하고 있었는데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부처님을 보지 못한 3억 가구는 슬픔과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문수보살이 가르치기를 “너희들이 우리 부처님을 지성으로 우러러 받든다면 불상을 주조하여 공양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3억 가구에 관하여 불상 1구씩을 주조하기 위한 금을 모으도록 하였다. 금을 불속에 집어넣어 튀어 오르는 것은 받고, 그러지 않은 것은 돌려보내니 나은 것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지만, 불상을 이루었다. 금의 양이 고르지 않아 불상의 크기도 서로 달랐는데 한자 쯤 되는 것도 있고 한자가 못되는 것도 있었다. 불상이 만들어지자 다시 하나의 종을 주조하였다. 여러 불상 가운데 상호를 온전히 갖춘 것을 골랐는데 모두 53상이었다. 한군데 모아 종 안에 봉안하고 또한 그 사실을 문서로 기록하였다. 덮개를 주조하여 그 종을 덮고 바다에 띄우며 축원하기를 ‘오직 우리 본사 석가 53상은 인연 있는 국토로 가서 머물기를 빕니다. 우리 또한 머무는 곳에 따라가서 말세중생에게 설법하여 제도하고 해탈에 이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바다에 띄우자마자 신룡이 나타나 머리에 이고 떠났다.

월지국(쿠샨 왕조 기원후 30년경∼375년경)에 이르자 그 나라 국왕 혁치는 종을 얻은 후 불상을 발견하자 몸소 그 지문(誌文=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날, 행적)을 짓고 서로 살아 잇는 듯 공경하며 중히 여기게 하였다. 곧 하나의 불전을 지어 봉안하였는데 불전에 갑자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 왕이 또 불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부처님이 왕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이곳에 살고 싶지 않으니 왕은 나를 만류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은 놀라 잠에서 깨어 다시 예전처럼 종에 봉안하고 바다에 띄우면서 서원을 세워 말하기를, “오직 우리 불상과 종은 마땅히 인연이 있는 국토로 향하소서! 나와 더불어 권속 수천 명은 반드시 호법선신이 항상 따르며 옹호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백금으로 별도의 덮개를 하나 만들어 그 서원을 새겨 종 안에 넣고, 다시 예전처럼 덮개를 덮어 몸소 바다에 띄우는 곳에 가서 송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절에는 월지왕(쿠샨 왕)의 사당이 있다.

종은 바다에 떠다니며 여러 나라를 모두 유력하다가 이 산의 동쪽 안창현(지금의 간성군) 포구에 이르렀으니 이때는 곧 신라 제2대 남해왕 원년이요 곧 한 평제 원시 4년 갑자년이었다. 안창현 사람들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현의 관리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그날 저녘 불상을 종에서 들어내고 뭍에 내렸다. 안창현 현령 노춘이 이 소식을 듣고 관례를 거느리고 그곳에 달려가니 머물렀던 종적만이 진흙에 완연히 새겨져 있었다. 또 풀잎과 나뭇가지가 다 이 산을 향하여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 이 산을 바라보며 30리쯤 가니, 쉬면서 풀을 깔고 앉았던 흔적이 보였다. 종을 두고 쉬던 곳을 지금도 ‘게방(憩房)이라 한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야기는 계속 되는데, 종이 사라진 이후 계속 산 속으로 들어가니 느릅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종은 바로 그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여러 부처들이 연못 언덕에 늘어서 있었다. 이때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 풍기고 상서로운 구름이 서리니 노춘과 관속들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우러러보며 한량없이 예배하였다. 드디어 돌아가 그러한 사실을 국왕께 상주하니, 왕이 경이롭게 여겨 친히 어가로 행차하여 불법에 귀의하고 곧 그곳에 절을 창건하여 봉안하고 느릅나무로 인하여 그 절의 이름을 유점사라고 하였다.

이상의 사적기를 종합해서 유점사의 창건연기를 보면 인도와 월지국(쿠샨왕조)에서부터 연유한 53불과 종을 금강산 유점사에 모셨다는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사적기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유점사는 5백여 칸을 지닌 대찰이었다. 이후 다소 침체했다가 1235년경에는 4천 여 승려를 초청하여 법석을 열어 낙성식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로 유점사는 금강산의 대찰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세월은 풍년이 들어 공양물을 싣고 가는 길은 끊이지 않으니, 스님들은 다시 돌아와 참 성품을 밝히는 분이 자주 있었다. 이런 연유로 안팎의 불자들은 존경과 믿음이 더욱 깊어 갔다. 공양을 베풀거나 우러러 예배하려고 왕래하는 자가 마치 저잣거리를 오가는 것과 같았다. “금강산에는 대성(大聖)인 담무갈보살( 曇無竭菩薩= Dharmogata 法起보살)의 진신이 머물던 곳이며 대경(大經=화엄경)에 이름이 실렸으니 진실로 천하의 명산이로다.”라고 극찬하고 있으며, “불상(53佛) 또한 문수대성께서 주조한 상으로 멀리 천축(인도)으로부터 와서 이 산에 마문 것이다”라고 민지는 사적기에서 적고 있다.

정현<불이성 무문관 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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