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 전승관, 금강산 유점사 포교소 자리에 건립

1929년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경성(서울) 포교소로 문을 연 불이성 법륜사 현판
박대륜 대종사
 불이성 법륜사를 창건한 박대륜 대종사 조사상이 영정사진과 함께 대불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남북한 정상은 지난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판문점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남북 간에 막혔던 65년간의 단절의 시대가 끝나고 남북한 주민의 자유왕래가 곧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불교계도 양 정상의 ‘판문점선언’을 전적으로 환영.지지하면서 남북불교계에도 희소식과 함께 남북불교교류에 획기적인 변화와 가시적인 교류가 있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불교계에서는 어느 종단보다도 태고종은 북한불교의 중심지인 금강산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은 ‘판문점선언’ 환영지지 논평과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지금 총무원 청사가 자리 잡고 있는 불이성 법륜사는 본래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경성(서울) 포교소이다. 지금도 현판이 걸려 있을 정도로 불이성 법륜사는 유점사 서울 포교소란 역사 앞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이성 무문관 한주 정현스님이 ‘불이성 법륜사와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는 어떤 관계인가?’란 제하로 3회에 걸쳐 집중 조명해 본다.<편집자 주>

불이성 법륜사의 의미와 활동

현재 불이성 법륜사는 한국불교문화전승관(이하 전승관) 건물 속에 포함되어 있다. 전승관은 지하 3층 지상 4층 건물로 연건평 1천 6백 평이다. 불이성 법륜사는 전승관 3층에 대불보전과 종무소와 대중 방과 주지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불이성(不二城)은 《유마경》의 불이 평등사상에서 가져온 말로서, 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며, 선악(善惡), 유무(有無), 깨끗함과 더러움, 등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불이사상(不二思想) 속에 담겨진 불교의 진리를 압축하여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절에 가면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 불이문이다.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뜻이다. 법륜(法輪)은 담마차크라Dharma cakra)라고 해서, 석존의 가르침으로서 범륜(梵輪)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설법하는 것을 전법륜(轉法輪=법륜을 돌린다)이라고 한다. 법을 전륜왕(轉輪王)의 수레바퀴 모양의 고대 인도의 무기인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으로, 세속의 왕자로서의 전륜왕이 윤보를 돌려 천하를 통일하는 것과 같이, 정신계의 왕자로서의 석가는 법륜을 돌려 삼계(三界)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불이성 법륜사는 불교의 핵심진리와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항상 돌게 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는 이름을 갖고 창건된 사찰이다.

본래 불이성 법륜사는 안변 석왕사의 경성(서울)포교당이었다. 아마도 운영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때가 1929년이다. 대륜스님은 1929년 3월 48세 시, 종로 사간동 소재 석왕사 포교당을 당시 금액 6천원(현 시가 10억 원 상당)에 매입해서 수리했다. 석왕사포교당에서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경성(서울) 포교소 불이성 법륜사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도회지 포교에 닻을 올렸다. 2019년 3월이면 90주년이 된다. 대륜스님은 포교소를 인수하자마자 불교부인자은방생회를 조직했다. 또한 담임포교사로는 해인사 보담강백(寶潭講伯)을 회주로 모시고 화엄산림법회를 개설했다. 당대 유명한 포명(抱明) 강백과 고경(古鏡)스님을 포교사로 영입했다고 대륜 스님의 행장기에 정리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을 근거로 본다면,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포교활동을 시도했고, 화엄산림법회라고 하는 전문적인 경전강설법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당시 매우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덕(學德)이 높은 학승들을 포교사로 영입한 것만 봐도 도심포교에 대한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대륜스님이 이처럼 현대적인 포교방법으로 전법활동을 하게 된 것은 일본불교 견학 체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불이성 법륜사가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경성 포교소의 이름을 띠게 된 두 가지 근거로서 일본불교의 체험과 유점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일본 불교의 견학과 체험이다.

대륜스님은 16세 때, 금강산 유점사로 입산한다. 동선 노사로부터 사미계를 받고 제허 노사의 상좌인 확운화상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후 사집과정까지 이수하고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신심으로 다음 해에 금강산 내원선방에서 참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경학 수학으로 돌아와서 치문.서장,.도서 및 《능가경》을 다시 정독하면서 수학했다. 이후 상방소임과 염불만일회 별좌 등 3년간 봉사하고, 27세 시에는 설하(雪河) 강백문하에서 사교과.대교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에 와서는 각황사(현 조계사) 감원에 취임하여 6년간 근속하고 평양 창전리에 유점사 포교당을 개설한다. 37세 때인 1918년 일본 유학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2년여 일본불교를 견학하고 할아버지 스님인 제허(霽虛) 노사의 열반과 49재 참석차 귀국했다.

이후 《금강경》 독송에 전념하면서 덕숭산 정혜사로 만공선사를 참방, 선문답을 교환하고 봉은사에 주석하던 한암선사를 참방, 선문답을 교환했다. 39세 시에 대본산 유점사에서 대덕법계를 품수 받고, 오대산 상원사 훈련원 주최로 일본 불교계를 시찰하면서, 포교 원력을 세우고 귀국하여 석왕사 포교당을 인수하여 유점사 경성 포교소 불이성 법륜사라고 개칭하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전국의 이름난 강백들을 초청하여 포교사로 영입, 포교활동을 벌였다. 1940년 59세 시에는 대본산 유점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 받았다. 1941년에는 비교적 젊은 청년승들인 덕암.남허.용봉스님 등에게 설교를 담당하도록 했다. 1945년 64세 때에는 유점사 주지에 취임했다.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금강산 유점사는 금강산에 있는 모든 사찰의 대본산이다. 《금강산유점사사적기》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 10월 「유점사기본(楡岾寺寄本)」이란 명칭으로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 7호에 실렸으며, 이능화(李能和)가 1918년에 간행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김탄월(金坦月)스님이 1942년에 편찬한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다시 수록되었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자료에 의해서 유점사에 대한 사적을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제도화한 <조선사찰선교양종 30본사 및 그 소속 말사>에 의하면 유점사는 풍악(楓嶽=금강산) 최초의 절이고 금강처럼 무너지지 않는 영험한 도량이라고 했다. 종지(宗旨)는 ‘선교양종 대본산유점사라 부른다.’로 정의하고 있다. 유점사 본.말사의 법계.보맥(譜脈)에 의하면, 유점사를 융성시킨 청허 휴정선사(서산대사)-법맥을 전수한 환성 지안선사-호암 체정선사-풍악보인선사이하의 법손이 주지가 된다고 했다. 유점사 제1임 주지는 김금담(錦潭)스님이며 명치(1911년)44년 11월 27일일 취임인가가 났고, 제2임 주지는 김동선(金東宣)스님이며 대정 4년(1915년) 3월 6일에 취임인가가 났다고 했다. 유점사는 53불상을 봉안한 능인보전(能仁寶殿), 수월당(水月堂), 영화사(蓮華社),제일선원,반룡단(盤龍堂),의화당(義和堂)과 서래각(西來閣) 등이다.

유점사 산내말사로는 흥성암,백련암,중내암,원통암,선원,반야암,명적암과 득도암 등이다. 산외말사로는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라고 했으며, 산외수말사로서는 마하연 정양사 등이라고 했는데, 유점사는 61개의 본.말사의 절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강산의 대부분의 절이 전부 유점사에 소속된 사암이었다. 지금 춘천시에 있는 청평사나 상원사와 철원군 심원사도 유점사 말사였다.

유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계속)

정현<불이성 무문관 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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