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의(논문)의 목적은 불교경전어로서의 불전한문(佛典漢文)교육의 전문성과 현대적 응용에 관하여 살펴보고 그 의의와 방안과 개선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문교육을 보다 심화시켜 한역경전을 바로 이해하고 터득하여 불타의 교법과 인도에서 흥기한 대승불교철학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전해진 불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불교경전어와 불전한문<5>

 

인도불교만이 전적으로 한역화(漢譯化)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인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으며, 인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했던 인도-그리스 왕국의 헬레니즘이 대승불교 형성에 끼친 영향, 수용해야 중국 한역불교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

 

불교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해서 한역되는 과정에서, 인도불교만이 전적으로 한역화(漢譯化)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인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한국불교가 너무 갇혀 있어서 이런 역사적인 사실마저도 왜곡이라고 외면할 수가 있다. 사실, 한 사람의 위대한 석학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 많은 지식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광박(廣博)한 지식과 세계불교사적 관점(觀點)을 가진 도량이 넓은 식견을 가진 분이라야 한다. 한역불교에만 국한해도 안 되지만, 소승적(상좌부) 불교에만 집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상좌-대승-바즈라야나(금강승)-동양철학사상-서양철학사상까지도 겸비한 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 불교학을 하는 분들에게는 너무 불리한 조건들이 많다. 4대 경전어인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와 한문에 능해야 하고, 영어와 일어 등에 소양이 있어야 외국 학자들의 저서와 연구 논문 등의 원전을 독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 학문적 기본 소양을 쌓으려면 시간과 공력이 얼마나 들어야 하겠는가. 우리나라에 이런 조건을 갖춘 학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의 노고를 생각해 보면서, 불교학 연구의 관점을 넓혀보자는 전제에서 그리스 사상이 대승불교에 끼친 영향을 담론해 보고자 한다.

 

 

`인도-그리스 왕국들(기원전 100년경)이 있었던 인도 서북부 지역.

헬레니즘(hellenism)은 넓은 의미에서 주로 고대 그리스에서 전파된 문화와 사상을 일컫는다. 좁은 의미에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의 그리스 문화의 급격한 전파를 말한다. 그리스어는 에라스무스를 기점으로 고대 그리스어와 현대 그리스어로 나눈다. 고대 그리스어는 악센트와 방점을 찍으며, 문법이나 단어 사용이 현대 그리스어와 다르다. 헬라스 시기(Hellenistic period)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3세)이 죽은 이후, 그리스 반도가 로마에 의해 편입된 기원전 146년을 말한다. 로마의 점령은 헬레니즘의 단절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며, 기독교의 부흥으로 헬레니즘의 명맥이 꾸준히 유지되어 왔기에, 단지 그리스의 독립적인 정치체제가 끝나는 시기로 잡은 것이다. 헬라스 시기에는 그리스어를 말하는 많은 도시국가들 중에서도 그리스 연맹이 강조되었다. 이중 핵심을 이루는 곳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의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와 셀레우시드 하의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크였다. 이처럼 헬레니즘 문화는 많은 종교들을 단합한 자유로운 문화라고 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지식을 한층 더 높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라 불렀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어를 헬라어라고도 하는데, 한국어 권에서는 특히 신약 성서를 쓴 언어를 헬라어 엄밀하게 말하면 평민계급이 사용한 코이네(공통어)라고 부른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약성서가 이 언어로 쓰였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경의 언어로서, ‘공통 그리스어’, 또는 ‘공통의 방언’ 또는 간단히 코이네는 고대 그리스어의 대표적인 형태로, 고전시기 이후(약 기원전 300년∼서기 300년)에 쓰였으며, 그리스어 역사의 제3기로 분류한다. 이의 다른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헬레네, 공통, 신약 그리스어 등으로 쓰인다. 코이네는 그리스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표준화된 언어이며 현대 그리스어의 직접적인 조상으로서 중요하며, 서양 문화의 언어 즉 지중해에서의 공용어였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기독교 성경이 쓰여 진 언어이며, 이는 기독교 전파와 가르침에 쓰여 진 언어였다는 것을 뜻한다. 비공식적으로 코이네는 로마 제국의 제2공용어였다. 중세 그리스어는 기원전 330년경부터 기원후1453년 사이에 사용된 언어를 말한다. 이제 헬레니즘의 공통 언어가 코이네라는 것을 알았다. 결론은 이런 헬레니즘이 인도로 전파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시대에는 지중해 문화권과 인도문화권의 교류가 빈번 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미 전회에서 살펴봤듯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인도 북부 지역에 존재했음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지역에는 그리스만이 아닌 로마와도 교섭이 있었다.

 

로마에서는 2세기에 박트리아 제국에서 온 사절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쿠샨왕조는 박트리아를 점령한 후, 로마까지 진출했으며 불교도 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後漢書』에는 로마와 인도 북동부의 교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인도 북동부는 로마와 통한다. 대진(로마)에는 면직물, 카펫, 향수, 설탕 덩어리, 후추, 생강, 검은 소금과 같은 것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세기와 2세기 동안 쿠샨 제국은 북동쪽으로 확장하여 타림 분지의 일부까지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몇 차례 전쟁을 하였다.

 

인도-스키타이는 인도-이란 사카의 분파이다. 그들은 남 시베리아에서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간다라, 카슈미르, 펀잡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4세기경까지 인도의 중서부 구자라트, 라자스탄으로 들어왔다. 첫 사카왕은 마우에스 또는 모가는 사카 권력을 간다라에 세워놓고 점차 북서 인디아에 우월권을 확장하였다. 인도 스키타이 지배는 서기 395년 루드라심바 3세의 서부 총독 령과 함께 끝났다.

 

스키타이 종족에 의한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의 침입은 인도 스키타이 침입으로 언급되는데 인도와 인근 나라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실 인도 스키타이 전쟁은 중국 종족과의 불화에서 중앙아시아 유목 전쟁에 의해 격발된 사건의 한 챕터였다. 그것은 박트리아, 카불, 파르티아, 인도는 물론 로마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스키타이 그룹은 인도로 침입하여 다양한 왕조를 세웠는데, 사카 외에도 파라마, 캄보자, 발리카스, 리시카스 와 파라다스 등이 있었다.

 

다음은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다. 그리스 세계의 최 동방 영역이었으며 기원전 250년에서 125년까지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그 영토로 하였다. 기원전 180년 그레코-박트리아인의 북 인도로 팽창은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다. 그것은 서기 1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250년 창건되었는데 그 때 셀레우코스 제국의 박트리아, 소그디아나와 마르기아나의 군사적 총독 디오도투스(테오도토스)는 프톨에마이오스 이집트와 분쟁에 휩쓸린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2세로부터 그의 영토의 독립을 위해 씨름하였다. 고대 박트리아의 수도 발흐의 그리스 유적 디오도투스는 박트리아의 첫 도시의 총독으로 스스로를 왕으로 포고하였다. 새로운 왕국은 동방의 도시화된 부유한 왕국으로 고려된다. 그것은 동서쪽으로 영토가 팽창하였다. 박트리아가 반란케 한 그리스인은 나라의 비옥함으로 강력하게 성장하여 아리아나 뿐만 아니라 인도의 제왕이 되었다. 그들의 도시는 박트라, 다랍사 그리고 다른 여러 도시가 있었다. 그중에는 지배자의 이름을 딴 에우크라티디아도 있었다. 헬리오클레스는 박트리아의 마지막 그리스인 왕으로서 월지 유목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유크라티데스의 후손은 인도-그리스 왕국을 다스렸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마지막 두 세기 동안 인도의 북서부와 북부의 다양한 부분을 30명 이상의 왕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들은 자주 서로 다투었다. 왕국은 그레코- 박트리아 왕 드미트리우스가 인도로 침입하였을 때 창건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도의 경계는 힌두쿠시 산맥으로 한다. 인도 내의 그리스는 결국 박트리아에 중심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에서 나누어졌다. 인도 그리스 왕국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왕조를 느슨하게 기술한다. 탁실라, 사갈라를 포함한 많은 도시들은 그들 시대의 수많은 가문을 포함하였다. 그들이 두 세기 동안 다스릴 때 인도 그리스 왕들은 그들의 주화에서 보이듯이 그리스어와 인도어와 문자를 조합하였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힌두와 불교를 혼합하였다. 인도 그리스 문화의 확산은 특히 그리스 불교 예술을 통해 오늘날에도 느껴지는 결과를 지녔다. 인도-그리스는 결국 서기 10세기에 정치적인 개체로서는 인도 스키타이의 침입으로 결국 사라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와 인도는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다. 로카세마(Lokaksema,支婁迦讖,167-186)와 같은 쿠샨의 승려가 중국 한나라의 수도 낙양과 같은 도시에서 불교를 전파했고,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에 머무르면서 역경을 하게 된 것이다. 로카세마는 낙양 백마사에서 178∼189년까지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Dào Xíng Bānruò Jīngthe》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Pratyutpanna Sutra, Bān Zhōu Sānmèi Jīng》 《아사세왕경 (阿闍世王經), ādūshì Wáng Jīng》 《잡비유경(雜譬喩經), Za biyu jing》 《수능엄경(首楞嚴經), Shou lengyan jing》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Wuliang qingjing pingdeng jue jing》 과 《보적경(寶積經), the Baoji jing》등을 한역했다. 하지만 그의 모국인 쿠샨 제국은 5세기에 훈족과 무슬림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로카세마(지루가참支婁迦讖147∼미상)는 쿠샨왕조의 월지국 간다라에서 147년에 태어난 그는 대승경전을 한역했다. 지루가참은 지참이라고도 한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그는 최초의 대승경전을 한역한 중요한 한역경승 가운데 한 분이다. 그의 모국어는 토하리아어이다. 그는 제4결집에 참여했다. 이 제4차 결집은 부파불교와 대승(Nikaya Buddhism 와 Mahayana Buddhism)이 갈라지는 결집이다. 월지국에서는 불교 전도 승으로 지루가참을 중국에 보냈다. 2세기에는 간다라에는 그리스 불교예술 (Greco-Buddhist art)이 불교와 헬레니즘의 영향에 의한 융합예술이 성행했다. 또 다른 월지국의 역경승은 지루가참의 제자인 지요(Zhi Yao,支曜)를 들 수 있다. 그는 185년에 중앙아시아에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Chengiu guangming jing》을 역경 했다.

 

타림분지의 중앙아시아의 많은 승려들은 중국에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전도와 한역경전은 파르티안(Parthian), 쿠샨(Kushan), 소그디안(Sogdian)과 쿠차(Kuchean) 출신 승려들이다. 파르티아(Parthia, 페르시아)는 오늘날 이란 지역의 북동쪽에 자리 잡은 문명이다. 그러나 전성기에는 이란 전 지역을 파르티아의 세력으로 뒤덮었을 뿐 아니라 아울러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이라크, 그루지야, 터키 동부, 시리아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 만 해안 지역, 바레인,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방까지 세력권에 넣었다.

 

 

원 응  (주필ㆍ종립 동방불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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