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의(논문)의 목적은 불교경전어로서의 불전한문(佛典漢文)교육의 전문성과 현대적 응용에 관하여 살펴보고 그 의의와 방안과 개선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문교육을 보다 심화시켜 한역경전을 바로 이해하고 터득하여 불타의 교법과 인도에서 흥기한 대승불교철학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전해진 불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쿠샨제국과 그레코 불교>>

알렉산더 대왕은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문명을
융합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간다라 미술’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냈다.

대승불교가 한역되는데 쿠샨제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샨 제국(기원 후 30∼375년)은 타지키스탄, 카스피 해,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대 제국이었다. 쿠샨제국은 월지 민족이 세웠으며,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제국 등과 교역했다. '쿠샨'은 중국어로 월지족의 다섯 민족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인 '귀상(貴霜)'에서 왔다. 월지족은 브라미 문자에 의한 토하라어군의 말을 썼던 사람들을 아울러 부르는 말로, 중국 역사가들에 따르면 휴밀(休密), 귀상, 쌍미(雙靡), 힐돈(肸頓), 도밀(都密) 다섯 부족으로 나뉜다. 그들은 원래 타림 분지의 초원에 살았으나, 기원전 176년~160년 흉노에 의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월지 민족은 기원전 135년경에 그리스의 식민지 나라였던 박트리아를 만났고 이를 점령하여 다섯 부족의 나라로 나누었다.

 

쿠샨제국은 중국 자료에 의하면 월지족이 세운 왕조인데, 이들은 흉노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이곳 타림분지에 정착했으며, 멸망 후에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중심이 되는 북인도까지 확장되는 쿠샨 왕조를 세우기 위해서 남쪽으로 이주했다. 흉노(匈奴)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현재의 몽골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이다.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 코카서스 일대에까지 달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며,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서부 만주, 그리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네이멍구 자치구, 간쑤 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달했다. 《산해경》에 따르면 흉노는 하(夏)나라 마지막 왕인 이계의 자손이라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월지족은 박트리아지역을 점령했는데, 이 지역은 이란계의 파르티아인과 그리스계인 박트리아인이 있었으나 아랄 해에서 온 샤카족들에게 밀렸다. 샤카족들은 월지족들에게 밀리고 월지족은 흉노에게 밀렸다. 이리하여 월지족은 박트리아 지역을 계속 압박하여 1세기 중반에는 인도 북부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으며, 훈족은 더 이상 인도 방향으로는 진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트리아 지역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한 때 불교가 성했던 곳이다. 박트리아(Bactria, 기원전 255∼139)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Balkh)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계 왕국이었다.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Demetrius I)는 기원전 183년 간다라, 펀자브와 인더스 계곡을 정복하였다. 현재의 동 이란과 파키스탄을 정복하였고 그 결과 인도-그리스 왕국을 만들어 냈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수입되는데 있어서 중국지역의 판도를 어느 정도 사전지식으로 입력해 나야 감이 잡힌다. 중국의 한족과 흉노는 때로는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보였다. 흉노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 의거한 것이며,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진시황은 흉노족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의 만리장성을 연결하였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한나라 때 증축한 것만 남아 있다. 한나라는 1세기 말부터 한나라 장군 반초(班超, 32∼102)를 시켜서 흉노를 물리치고 타림분지를 통제하도록 했다. 후에 강성해진 쿠샨왕조가 다시 타림분지에 돌아온 것은 1∼2세기이다. 쿠샨왕조는 지금의 카스 시 (喀什市 Kashgar)에 왕국을 세우고, 유목민과 중국을 통제하여 격파시켰다. 쿠샨왕조는 브라미 문자(Brahmi script)를 소개하고 인도의 프라크리트어(Indian Prakrit language)를 행정과 불교공용어로 사용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아시아로 불교를 전파하는데, 주 언어로 역할을 했다. 타림분지의 미란에서 발견된 불교경전들은 간다라와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함이 밝혀졌다.

 

브라미 문자(Brāhmī script)는 브라만족의 알파벳 문자이다. 브라미 문자는 산스크리트어와는 다른 산스크리트어 보다 그 이전의 문자인 아소카 석주에 새겨진 문자와 같다. 카로슈티(Kharoshthi) 문자처럼 브라미는 프라크리트어의 방언으로 사용되었다. 제의서(祭儀書)에나 빌딩과 무덤에 사용되었다. 산스크리트어는 몇 세기 후 까지도 사용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산스크리트어로 대체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브라미는 산스크리트어에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라미 문자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 치세 시에 사용된 제국 칙령에 사용된 문자로서 인도의 언어역사상 매우 중요하고 초기 불교 특히 아소카의 칙령 연구에는 절대적이다. 토하라어는 지금의 신장 타림 분지에서 쓰이던 인도유럽어족의 언어였다. 토하라아어 A(아그나어, 동 토카리아어)와 토하라어 B(쿠챠어, 서 토하라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 가운데에서는 가장 동쪽에서 쓰이는 언어였다. 6세기경에서 8세기경까지 쓰인 뒤 사멸 했다. 토하라어는 브라미 문자로 기록되었다. 19세기 말에 문헌이 발견되어 연구가 시작되었다.

 

다시 쿠샨제국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기원전 1세기에 귀상족이 나머지 네 부족을 정복시켰다. '귀상'이라는 이름은 서양에 '쿠샨'으로 전해졌지만 중국에서는 쿠샨 제국을 계속 월지라 불렀다. 처음 쿠샨 제국은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大夏)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자를 썼고, 그리스를 본 따 동전을 만들어 사용했었다. 쿠샨 제국은 인도양을 통한 무역과 실크로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쿠샨제국은 동서양의 문화를 포용하여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그레코 불교(Greco-Buddhism)가 발달하게 되는 가교역할을 했다. 그레코 불교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의 페르시아와 인도 정복에 의한 그리스-인도 왕국으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인도 정복을 통해서 헬레니즘문화를 동방에 가져왔다. 쿠샨왕조의 그레코-불교는 동서사상의 융합으로서 헬레니즘과 불교의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대승불교의 흥기와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쿠샨의 카니슈카 1세는 인도의 아소카(Aśokaḥ)왕과 그리스-인도 왕국의 메난더(Menander) 1세와 함께 불교를 부흥시킨 왕 중 하나였다. 메난더 1세는 ‘밀린다 왕’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나가세나(Nāgasena) 비구와의 대담인 《밀린다왕문경》은 한역되어있다. 《밀린다왕문경》은 《밀린다팡하(Milinda Pañha》의 한역으로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경이라고 부르지만 불설(佛說)이 아니며, 빨리어 삼장에서는 장외(藏外)에 들어 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인 박트리아 국왕 밀린다(메난드로스)가 불교승려인 나가세나(那先比丘Nāgasena.)에게 불교 교리에 대해서 질문하면, 승이 이에 해답(解答)을 하는 대화 형식으로 된 성전으로서, 성립 시기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 1세기 전반 사이로 되어 있다. 내용은 대별해서 3편 내지 4편으로 되어 있으며 제1편은 밀린다와 나가세나의 전생(前生) 이야기를 서술한 서론과 두 사람이 3일간에 걸친 대화 끝에 밀린다가 제자가 되는 이야기다.(서론과 대화의 부분을 2편으로 본다면 4편이 된다), 제2편은 밀린다가 불교 교리상의 어려운 문제를 들어 그 해답을 나가세나에게 구한 대화, 제3편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德目)을 비유로써 풀이한 대화이다. 특히 그리스적인 사유(思惟)와 인도 내지는 불교적 사유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 성전의 사상적 의의와 가치가 중시되고 있다.

 

우리는 인도 불교가 단순하게 중국에 직수입되는 줄로 알지만, 그 과정에는 그리스 사상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대승불교권의 제4차 경전결집은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1세의 후원으로 이루어 졌으며, 헬레니즘문화에 의한 그레코-불교를 생각하면서 구도를 그려야 한다. 카니슈카 1세 그는 카슈미르에서 불교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는 대승불교가 부파(Nikaya)에서 분리해 새로운 분파로 시작하게 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레코 불교를 잠시 일별하고 이야기를 전개해야 이해가 빠르다.

 

그레코 불교(Greco-Buddhism)는 그리스가 소아시아, 페르시아와 인도에 그리스 왕국을 세우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박트리아를 비롯해서 그리스-인도 왕국이 세워진 서북부 인도의 간다라 지방인 탁실라를 중심으로 해서 융합된 문화이다. 특히 쿠샨왕조에 이르러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실상 쿠샨왕조는 그리스계라기 보다는 페르시아계에 가깝지만, 박트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리스-인도 왕국을 계승함으로써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의 불교를 동시에 받아들인 타림분지의 초원 출신의 월지 민족이다. 하지만, 쿠샨왕조는 양 문화를 융합하여 그레코 불교문화를 재창조함으로써 불교사에 획기적인 분수령을 만든다. 쿠샨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동시에 불교문화를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아시아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승불교를 탄생시켜 동아시아로 전해준다는 사실이다. 중국 한국 일본 월남 대만 등의 대승불교는 바로 이 쿠샨왕조의 그레코-불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많은 연구업적이 나옴으로써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져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대승불교는 티베트-몽골 불교와의 전통을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인도의 불교문화와 융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알렉산더는 누구인가.?

 

알렉산더 대왕(그리스어는 알렉산드로스 前 356년~前 323년)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세운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으로서 20세에 왕위에 올랐다. 페르시아제국을 점령하고, 기원전 326년에는 북인도로 진출하여 정복하고, 이집트도 정복했다. 기원전 334년부터 동방원정을 시작하여 10년 만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지치지 않는 정복에서 오는 피곤과 스트레스 등이 힘들게 하고 병사들은 전염병 등으로 많은 병사가 사망했고 결국 알렉산더는 열병으로 죽었다. 그는 제국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들을 세웠다. 도시들 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서융합정책은 동방과 서방문화가 융합되어 간다라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냈으며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인도 왕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나라는 아나톨리아(Anatolia)이다. 아나톨리아는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터키의 넓은 고원 지대를 말한다. 아나톨리아는 이전에는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렸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충돌과 문화적 교차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아나톨리아란 고대 그리스어의 아나톨리코스(Anatolikos)에서 온 말로서 ‘해가 뜨는 곳’, 다시 말해 ‘동쪽’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유럽에서 볼 때 동쪽에 소아시아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다음은 셀레우코스 제국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토 가운데 헬레니즘의 계승 국이다. 제국의 최대 영토는 아나톨리아 중부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투르크메니스탄, 파미르, 인더스 계곡을 포함한다. 셀레우코스 왕조에는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 60년까지 30명의 왕이 있었다. 이 통치기 동안 지배계층은 헬레니즘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피지배계층의 문화를 무시하고 그리스 화(化)만을 강요하다가 피지배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힘이 약해져 나중에는 로마에게 멸망하게 된다. 왕으로는 셀레우쿠스 1~7세, 안티오쿠스 1~13세, 알렉산드로스 발라스, 알렉산드로 2세 자비나스, 드미트리우스 2세 등이 있다.

 

 

 

원 응  (주필ㆍ종립 동방불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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