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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2018)년 05월 28일 월요일
베트남 불교의 어제와 오늘
베트남 불교의 어제와 오늘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8.05.0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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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전통과 대승이 공존하는 조화의 불교
태고종 총무원장 큰 스님 현지에서 법문, 3백만 명이 동시에 시청

 

오늘의 베트남 통일은 호찌민이라는 민족주의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통일이전의 베트남은 전쟁과 이념의 대결로 인한 불교는 그 다음이었다. 이제 불교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급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할 수가 있었다. 상좌부와 대승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조화로운 불교 승가가 사이좋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네 개의 불교대학에서도 상좌부 비구들도 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승니 6만명 사원 2만개를 포용한 베트남 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밝다고 할 것이다. 4월 27일 저녁 호찌민 시 중심가에 위치한 각오사에서의 법회는 참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태고종 편백운 큰 스님께서 법문을 했는데, 인터넷 방송이 라이브로 중계했다. 무려 3백만 명이 시청했다고 한다. 지금쯤은 누적 조회 수가 1천만을 넘어서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불교전파력이다. 부디즘투데이(www.buddhismtoday)를 운영하는 틱낫투 스님의 활동과 포교감각은 너무나 탁월하다고 할 것이며, 베트남 불교를 한층 격상시키는데 온 정열을 쏟고 있는 그의 그칠 줄 모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베트남 불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질곡 많은 시련을 겪었다. 프랑스식민지시대에는 그렇다고 치더러도 현대 베트남의 역사는 엎어진 자에게 뒤통수를 치는 격으로 베트남 불교에 치명타를 안겼지만, 종교의 힘이란 강렬한 폭발력을 갖는다. 현대 베트남 불교의 왕성한 이면에는 베트남 전쟁이란 비극에서의 탈출이 한몫하고 있다.

베트남의 현대사는 베트남 전쟁이란 비극과 함께 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1954년 8월 1일) 이후 분단되었던 베트남에서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전쟁 양상을 띠었고,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는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약칭 '베트콩')의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 미국, 대한민국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3월 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불교 또한 갈라놓았다. 베트남 불교는 일찍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유불선(儒佛仙)이 공존하였고, 유교와 불교가 사회 지도이념으로 역할을 하는 국가였다. 불교도 중국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6, 7세기경에는 선불교의 전통이 유입되어서 나중에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풍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 베트남 불교는 한동안 휴면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전쟁의 발발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발발은 프랑스에 원인근거 이유가 있다.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와 베트남이 치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제2차 인도차이전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월남전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였던 응우옌 왕조는 쩐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는 인도 식민지 각축에서 영국에게 패한 뒤 베트남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미국 독립 전쟁으로 비롯된 경제 위기로 당장에 식민지화 정책을 펴지는 못하였고, 소극적인 통상과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 파견에 그쳤다. 응우옌 왕조는 새 왕조를 세운 뒤 배외 정책을 폈고, 2대 황제였던 민망(Minh Mạng, 明命)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의 선교를 금지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 1843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Léonard Charner) 대령의 지휘 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할양받은 이후 차츰 식민지를 확대하여 1887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병합한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설립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응우옌 왕조가 무너진 뒤 베트남에서는 지속적인 독립 운동이 있었다. 1885년 관군이 프랑스군에 패하자 응우옌 왕조의 관원이었던 쯔엉딘(Trương Định)은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나, 결국 수세에 몰려 자결하였다. 무장투쟁이 실패로 돌아 간 뒤에는 문신들에 의한 근왕운동이 있었고, 근왕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판보이쩌우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항불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자국의 방어를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있던 군대를 송환하였으며, 이 공백기를 틈타 일본군이 베트남을 점령하였다. 여기서 전쟁 이야기를 하려면 책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왜 전쟁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베트남 근 현대 불교를 리서치 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통과의례이다.

이제 호찌민에 주목해 보자. 1930년 호찌민이 결성한 베트남 공산당과 1941년 결성된 비엣민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 제국의 점령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호찌민은 비엣민에 대한 중화민국의 중국 국민당 정부와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었다. 미국의 전략사무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비엣민을 지원하였으나 1945년 프랑스 측이 비엣민이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지원을 중단하였다. 호찌민은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던 시기인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중북부 지방의 응에안 성 호앙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 신삭(阮生色)은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 호앙띠로안 역시 농사를 짓고 서당 훈장도 하였던 유학자의 딸 이었다. 지식인 출신의 아버지 응우옌 신삭은 오랫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교적 소양이 있어 동네 훈장으로도 활동했다. 호찌민은 아버지 밑에서 한자와 유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1912년에 응우옌 바(Ba)라는 가명으로 선박 요리사 보조로 취직, 선박 요리사로 일하며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뉴욕의 할렘과 보스턴에서 살았다. 1914년에는 배편으로 영국에 건너가, 영국 런던에서 하인, 견습공 등으로 생활하였고, 런던에서 생활하다 1917년∼1918년에는 브루클린으로 건너가 부유층 집안의 집사로 활동했다. 1918년 다시 프랑스 마르세유로 건너갔다. 그 뒤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웨이터, 댄서, 사진 수정자, 식당의 화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1918년에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시야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의식은 갈수록 성장하였다. 미천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한때는 브루클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일했고, 제너럴 모터스에서 생산라인 관리자로 일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기간 동안 할렘에서 마커스 가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만나서 정치적 전망을 넓힌 것으로도 전해진다.

1917년 파리로 옮겨갔지만 그 해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파리에서 개최된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인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인 대표로 참석, 베트남인의 참정권, 평등권을 요구했다. 1919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선다.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파리 체류 시절 그는 응우옌 아이꾸옥(阮愛國)이라는 가명을 썼다. 그는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1919년 6월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이때 언론에 조명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때, 그는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소련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1921년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 식민지 인민연맹을 결성하고, 인민연맹의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를 편집·발행의 책임을 맡았다. 《르 파리아》에서 그는 프랑스, 독일,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과, 프랑스의 베트남인 차별의 해악을 고발하였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수년간 프랑스에서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투쟁활동을 벌이고 나서 1923년 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3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동방부 담당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이 되었고, 1925년까지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익혔다는 것이 호찌민의 대강의 스토리이다.

원응<주필>